[인물 열전 #8] 율리우스 카이사르 — 주사위는 던져졌다, 로마 공화정을 끝낸 남자

기원전 100년, 로마는 공화정의 마지막 황혼기를 맞고 있었다. 원로원의 권위는 흔들렸고, 평민과 귀족의 갈등은 폭발 직전이었다. 그 혼란의 한가운데에서 한 인물이 태어났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그는 정치가이자 군인이었고, 작가이자 웅변가였으며, 무엇보다 ‘로마’라는 천 년 제국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람이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주인공으로, ‘Veni Vidi Vici’의 화자로,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의 주인공으로 그는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카이사르 연대기와 명언

1. 명문가의 가난한 청년

카이사르는 율리우스 가문이라는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가문은 이미 정치적·경제적으로 쇠락한 상태였다. 가문의 명성에 비해 권력은 보잘것없었고, 청년 카이사르는 빚더미 위에 살았다. 그러나 그는 일찍부터 비범한 야심을 드러냈다. 18세에 술라(Sulla)의 정적이 되었고, 처형 위기를 가까스로 피했다. 22세에 해적에게 납치되었을 때는 자신이 요구한 몸값이 너무 적다며 두 배로 올리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풀려난 뒤에는 약속한 대로 직접 함대를 꾸려 그 해적들을 잡아 십자가형에 처했다.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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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1차 삼두정치

기원전 60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Pompeius)·크라수스(Crassus)와 비밀 동맹을 맺었다. 이른바 제1차 삼두정치다. 군사적 영웅 폼페이우스, 로마 최고의 부자 크라수스, 그리고 평민의 인기를 한 몸에 받던 카이사르. 세 사람은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며 원로원을 무력화시켰다. 카이사르는 이 동맹의 힘으로 집정관 자리에 올랐고, 임기가 끝나자 갈리아(오늘날 프랑스·벨기에·스위스 일대) 총독으로 부임했다. 평범한 정치가에게는 임기 후의 한직(閒職)이었지만, 카이사르에게는 자기 군대를 가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3. 갈리아 정복 — 알레시아의 기적

기원전 58년부터 51년까지,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을 수행했다. 8년 동안 그는 800개 도시를 공격했고, 300개 부족을 굴복시켰으며, 100만 명을 죽이고 100만 명을 노예로 팔았다고 본인이 직접 기록했다. 결정적 순간은 기원전 52년의 알레시아 전투였다. 갈리아 부족장 베르킨게토릭스(Vercingetorix)가 이끄는 8만 군대를 카이사르의 5만 군단이 포위했고, 동시에 외부에서 25만 갈리아 구원군이 카이사르를 역포위했다. 카이사르는 이중 성벽—안쪽 18km, 바깥쪽 21km—을 단 몇 주 만에 쌓아 양면 전투를 수행했고, 결국 승리했다. 이 전투로 갈리아 정복은 사실상 완료되었고, 그는 정치적·군사적으로 폼페이우스에 필적하는 거인이 되었다.

갈리아 전쟁과 알레시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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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루비콘을 건너다

그동안 로마에서는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 중 전사하면서 삼두정치는 깨졌다. 폼페이우스는 원로원과 손잡고 카이사르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단신으로 로마에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군대 없이 돌아간다는 건 곧 정치적 사형 선고였다. 기원전 49년 1월 10일, 카이사르는 갈리아와 이탈리아 본토의 경계인 루비콘 강 앞에 섰다.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는 순간 그는 국법을 어긴 반역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잠시 망설인 뒤 외쳤다. “Alea iacta est —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리고 강을 건넜다. 로마 내전의 시작이었다.

5. 파르살루스와 클레오파트라

내전은 빠르게 전개되었다. 폼페이우스는 그리스로 후퇴해 동방의 자원을 모았고, 카이사르는 이탈리아·스페인을 차례로 평정했다. 두 거인이 마주친 곳은 그리스의 파르살루스 평원(기원전 48년)이었다. 폼페이우스 군은 4만 5천, 카이사르 군은 2만 2천. 병력 면에서 압도적 열세였지만 카이사르는 기습적인 우익 돌격으로 폼페이우스의 기병대를 무너뜨렸고, 결국 완승을 거두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주했지만 그곳에서 살해당했다. 카이사르는 이집트에 도착해 클레오파트라(Cleopatra)와 만났고, 그녀를 이집트의 단독 통치자로 옹립했다. 이 만남에서 그들의 아들 카이사리온(Caesarion)이 태어났다.

6. 종신 독재관 — 황제 직전의 권력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단계적으로 권력을 집중시켰다. 기원전 46년 10년 임기 독재관, 기원전 44년에는 종신 독재관(Dictator perpetuo)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거대한 개혁을 추진했다. 율리우스력(Julian Calendar)을 도입해 1년을 365.25일로 정했고(이는 1582년 그레고리력으로 개정되기 전까지 유럽 표준이 되었다), 평민에 대한 토지 분배, 식민시 건설, 시민권 확대, 로마 항만·도로 정비 등을 단행했다. 그러나 종신 독재관이라는 자리는 공화정의 원리—’1인의 영구 권력 금지’—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원로원의 공화정 옹호파에게 그는 곧 ‘왕이 되려는 자’로 보였다.

7. 3월의 이데스 — 23번의 칼

기원전 44년 3월 15일—이른바 ‘3월의 이데스(Ides of March)‘—원로원 회의장에서 카이사르는 60여 명의 음모자에게 둘러싸였다. 그중에는 그가 아들처럼 아끼던 마르쿠스 브루투스(Marcus Brutus)도 있었다. 카이사르는 23차례 칼에 찔렸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따르면 그는 마지막 순간 브루투스를 보며 “Et tu, Brute?—브루투스, 너마저?”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음모자들이 노렸던 ‘공화정의 부활’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민들은 카이사르의 죽음에 분노했고, 내전이 다시 발발했다. 그 끝에서 카이사르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Octavianus)는 안토니우스를 누르고 최초의 황제, 즉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되었다. 카이사르가 시작한 길을 그의 후계자가 완성한 것이다.

카이사르 암살 - 23번의 칼

8. 카이사르가 남긴 것

카이사르의 유산은 단순히 한 인물의 영광에 머물지 않는다. 그가 도입한 율리우스력은 1600년 동안 유럽의 시간을 지배했고, 그의 이름 ‘Caesar’는 독일의 카이저(Kaiser), 러시아의 차르(Czar)로 변형되어 군주를 뜻하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7월(July)이라는 달 이름은 그의 이름(Julius)에서 왔다. 정치적으로 그는 로마 공화정을 끝내고 제정의 길을 열었고, 그 제국은 이후 500년간 지중해 세계를 지배했다. 한 명의 야심가가 어떻게 천 년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천 년 체제를 만들었는지—그 극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이 바로 카이사르였다. 그가 남긴 “Veni, Vidi, Vici—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는 단순한 군사 보고서가 아니라, 한 인간이 운명에 맞서는 방식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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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FAQ)

Q1. 카이사르는 황제였나요?

엄밀히 말해 황제(Imperator/Augustus)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종신 독재관(Dictator perpetuo)’이었고, 로마 최초의 황제는 그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입니다. 다만 카이사르의 권력 집중이 제정의 토대를 마련했기에 사실상의 1대 황제처럼 평가됩니다.

Q2.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기원전 49년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며 한 말로,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운명에 모든 것을 건다”는 의미입니다. 군대를 이끌고 본국으로 진군한다는 건 반역죄였기에, 이후 큰 결단을 내릴 때 비유적으로 사용됩니다.

Q3.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관계는?

정치적 동맹이자 연인 관계였습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 단독 통치자로 옹립했고, 둘 사이에 카이사리온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카이사르 사후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와 동맹을 맺었지만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면서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Q4. 율리우스력은 지금도 사용되나요?

현재 일반적으로 쓰이는 달력은 1582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도입한 그레고리력입니다. 율리우스력은 매년 약 11분의 오차가 누적되어 16세기까지 약 10일이 어긋났기 때문에 개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정교회 국가에서는 아직도 종교 행사에 율리우스력을 사용합니다.

Q5. 브루투스는 왜 카이사르를 죽였나요?

브루투스는 공화정의 가치를 신봉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에 오르며 사실상 왕이 되려 한다고 보았고, 로마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암살에 가담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공화정은 부활하지 못했고, 브루투스 자신도 2년 뒤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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