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1] 로마 — 영원의 도시, 2,700년 역사의 무대

이탈리아 여행의 출발점은 언제나 로마입니다. BC 753년 로물루스가 도시를 세웠다는 전설부터 AD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까지 1,200년, 그리고 다시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약 2,700년 동안 한 도시가 끊임없이 세계사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경이롭습니다.

영원의 도시(Roma Aeterna)라는 별명은 단순한 수사가 아닙니다. 콜로세움의 돌계단, 포로 로마노의 무너진 기둥, 판테온의 둥근 천창, 트레비 분수의 물줄기, 그리고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의 미켈란젤로 「천지창조」까지 — 로마는 시대마다 다른 얼굴로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콜로세움 단면과 로마 제국 연표

1. 콜로세움 — 5만 관중이 들어찼던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Colosseo)의 정식 이름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Amphitheatrum Flavium)입니다. AD 70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AD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가 완공했고, 100일간의 개막 경기에서 9,000마리의 동물과 수많은 검투사가 등장했다고 합니다. 지름 188m, 높이 48m, 둘레 545m의 거대한 타원형 건물에 약 5만 명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4층 구조는 철저한 신분 질서를 반영합니다. 1층은 황제와 원로원, 2층은 기사 계급, 3층은 일반 시민, 4층은 평민과 노예·여성을 위한 자리였죠. 검투사 경기는 약 400년간 지속되었고, AD 404년 호노리우스 황제가 공식적으로 폐지하기 전까지 로마인의 가장 중요한 오락이었습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2000, 리들리 스콧)에서 러셀 크로우가 연기한 막시무스의 명대사 “나의 이름은 막시무스 데키무스 메리디우스”가 콜로세움의 모래밭 위에서 울려 퍼지는 장면은 이 공간이 가진 비극과 위엄을 완벽히 보여줍니다. 실제 콜로세움 내부에 서면 그 함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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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포로 로마노 — 천 년 정치의 무대

콜로세움 바로 옆 포로 로마노(Foro Romano)는 공화정 시대부터 제정 말기까지 1,000년 가까이 로마의 정치·종교 중심이었습니다. 원로원 건물 쿠리아 율리아, 베스타 신전, 사투르누스 신전, 그리고 카이사르가 화장된 자리(Tempio del Divo Giulio)가 모두 이곳에 있습니다.

BC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 극장에서 암살된 뒤, 그의 시신은 포로 로마노에서 화장되었고 그 자리에 신전이 세워졌습니다. 지금도 관광객들이 카이사르 화장터에 꽃을 놓는 모습을 볼 수 있죠. 안토니우스의 추도 연설(“친구여, 로마인들이여, 동포여”)이 행해진 자리도 이 부근입니다.

포로 로마노 바로 위 팔라티노 언덕(Palatino)은 로물루스가 도시를 세웠다는 전설의 장소이자, 아우구스투스 이후 황제들의 궁전이 위치했던 곳입니다. “팰리스(palace)”라는 영어 단어가 바로 이 언덕 이름에서 왔습니다.

3. 판테온 — 1,900년을 버틴 콘크리트 돔

판테온(Pantheon)은 AD 125년경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재건한 만신전입니다. 직경 43.3m의 콘크리트 돔은 1436년 피렌체 두오모가 완성될 때까지 약 1,300년간 세계 최대 돔이었습니다. 천장 한가운데 직경 8.7m의 원형 개구부(오쿨루스)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판테온이 오늘날까지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는 이유는 AD 609년 비잔틴 황제 포카스가 교황 보니파시오 4세에게 이 건물을 선물해 기독교 성당(Santa Maria ad Martyres)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입니다. 라파엘로의 무덤도 이곳에 있습니다.

오현제와 로마의 거장들

4. 바티칸 — 세계 최소 국가의 미술 보고

바티칸 시국은 면적 0.44㎢, 인구 약 800명의 세계 최소 독립국입니다. 1929년 라테란 조약으로 무솔리니 정부와 교황청 사이에 체결되어 정식 국가가 되었지만, 사실상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첫 성당을 세운 이래 줄곧 가톨릭의 중심지였습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은 현재 모습으로는 1506~1626년에 재건되었고, 브라만테·라파엘로·미켈란젤로·베르니니가 차례로 설계와 장식에 참여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대돔의 높이는 132m이며, 쿠폴라에 올라가면 로마 시내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바티칸 박물관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시스티나 예배당입니다. 미켈란젤로가 1508~1512년 4년 동안 누운 채로 그렸다는 일화는 사실 과장이지만(실제로는 서서 작업했습니다), 천장에 9개 장면으로 펼쳐진 「천지창조」는 르네상스 회화의 정점입니다. 「아담의 창조」에서 신과 아담의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한 장면은 미술사 최고의 아이콘 중 하나죠.

25년 뒤인 1536~1541년 미켈란젤로는 같은 예배당 제단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렸습니다. 391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거대한 벽화로, 가운데 그리스도가 오른손을 들어 선과 악을 가르는 장면이 압권입니다.

5. 트레비 분수와 스페인 광장 — 영화 속 로마

트레비 분수(Fontana di Trevi)는 1762년 니콜라 살비가 완성한 바로크 걸작입니다. 가운데 바다의 신 오케아노스가 두 마리 해마(말 같은 모습)를 거느리고 있고, 양옆에 풍요와 건강의 여신상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동전을 등 뒤로 던져 분수에 들어가면 다시 로마로 돌아온다는 전설은 영화 「애천(Three Coins in the Fountain)」(1954)에서 본격적으로 알려졌습니다.

실제로 매년 트레비 분수에 던져지는 동전이 연간 약 150만 유로에 달하며, 로마 시는 이 돈을 카리타스(가톨릭 자선단체)에 기부합니다. 영화 「달콤한 인생」(1960, 펠리니)에서 아니타 에크베르크가 분수에 뛰어든 장면은 영화사의 명장면 중 하나입니다.

스페인 광장(Piazza di Spagna)은 영화 「로마의 휴일」(1953, 윌리엄 와일러)에서 오드리 헵번이 젤라토를 먹는 장면으로 유명합니다. 광장 위쪽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으로 올라가는 138개의 계단(스페인 계단)은 1726년 완성되었고, 광장 아래 바르카치아 분수는 베르니니의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니니의 작품입니다.

6. 카타콤 — 지하의 기독교 박물관

AD 2~5세기 박해 시기 로마 기독교인들은 도시 외곽 지하에 광대한 묘지망을 만들었습니다. 아피아 가도(Via Appia) 일대의 산 칼리스토 카타콤, 산 세바스티아노 카타콤, 도미틸라 카타콤이 대표적입니다. 총 길이는 약 150km로 추정되며 약 50만 기의 무덤이 있습니다.

카타콤 벽에는 초기 기독교의 상징인 물고기(ICTHYS), 닻, 선한 목자상이 그려져 있어 콘스탄티누스 이전 기독교 미술을 연구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가 됩니다. 현재 5곳의 카타콤이 일반에 공개되며, 입장료는 €10 안팎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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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영화로 보는 로마

로마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셀 수 없이 많지만, 여행 전후로 꼭 챙겨봐야 할 작품을 추려봅니다.

「로마의 휴일」(1953, 윌리엄 와일러) — 오드리 헵번이 앤 공주로 데뷔한 흑백 명작. 진실의 입, 콜로세움, 스페인 광장, 트레비 분수가 모두 등장합니다.

「글래디에이터」(2000, 리들리 스콧) — 코모두스 황제 시절을 배경으로 한 검투사 막시무스의 복수극. 콜로세움 내부 재현이 압권입니다.

「위대한 아름다움」(2013, 파올로 소렌티노) — 현대 로마의 데카당스를 그린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수상작. 야경 속 로마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줍니다.

「달콤한 인생」(1960, 페데리코 펠리니) — 트레비 분수와 비아 베네토. 이탈리아 영화의 황금기를 상징합니다.

8. 여행 정보 — 가는 길과 입장료

로마 여행 가이드 — 핵심 7개 명소

가는 길: 인천공항에서 로마 피우미치노(FCO)까지 대한항공·아시아나·ITA가 직항을 운항합니다. 비행시간 약 12시간 30분(가는 길), 11시간 30분(오는 길). 공항에서 시내까지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공항열차)로 32분, €14.

입장권 팁: 콜로세움+포로 로마노+팔라티노 통합권 €18은 반드시 온라인 예약(coopculture.it)이 필요합니다. 바티칸 박물관도 €20에 시간 지정 예약 필수. 두 곳 모두 한여름 성수기에는 1~2주 전 예약이 필요합니다. 로마 패스(72시간 €52)는 2곳 무료 + 대중교통 무제한이지만 콜로세움·바티칸은 별도입니다.

추천 시기: 4~5월(꽃이 피고 기온 20도 안팎)과 9~10월(가을 햇살). 7~8월은 35도 이상 기온에 관광객도 가장 많아 콜로세움 줄이 2시간 이상 됩니다. 12~2월은 비교적 한산하지만 비 오는 날이 많습니다.

숙소: 테르미니 역 일대는 교통은 편리하지만 다소 번잡합니다. 첸트로 스토리코(나보나 광장 인근)나 트라스테베레가 분위기는 좋지만 가격이 높은 편. 3성급 €120~180, 4성급 €200~350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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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FAQ)

Q1. 콜로세움은 예약 없이도 입장 가능한가요?

현장 구매도 가능하지만 1~2시간 줄을 서야 합니다. 공식 사이트(coopculture.it)에서 시간 지정 입장권을 예약하는 것이 거의 필수입니다. €2의 예약 수수료가 추가됩니다.

Q2. 바티칸 박물관 무료입장일이 있나요?

네, 매월 마지막 일요일은 무료입니다(오전 9시~12시 30분, 14시까지 퇴장). 다만 그날은 어마어마하게 붐비기 때문에 새벽부터 줄을 서야 합니다.

Q3. 「로마의 휴일」 진실의 입은 어디에 있나요?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Santa Maria in Cosmedin)의 현관에 있습니다. 콜로세움에서 도보 15분 거리이며, 입장은 무료입니다.

Q4. 로마 시내에서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하면 좋나요?

지하철 A·B 두 노선이 있지만 노선이 단순합니다. 주요 명소는 대부분 도보로 이동 가능하며, 멀리 갈 때는 트램·버스 혹은 택시(기본 €4)가 편리합니다. 24시간 교통권은 €7.

Q5. 로마에서 꼭 먹어봐야 할 음식은?

카르보나라(베이컨·달걀노른자·페코리노 치즈), 카초 에 페페(페코리노+후추 파스타), 아마트리치아나(토마토+관찰레)는 로마에서 탄생한 4대 파스타입니다. 트라스테베레의 노포에서 정통 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인물 열전 #8] 율리우스 카이사르 — 주사위는 던져졌다, 로마 공화정을 끝낸 남자

기원전 100년, 로마는 공화정의 마지막 황혼기를 맞고 있었다. 원로원의 권위는 흔들렸고, 평민과 귀족의 갈등은 폭발 직전이었다. 그 혼란의 한가운데에서 한 인물이 태어났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그는 정치가이자 군인이었고, 작가이자 웅변가였으며, 무엇보다 ‘로마’라는 천 년 제국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람이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주인공으로, ‘Veni Vidi Vici’의 화자로,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의 주인공으로 그는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카이사르 연대기와 명언

1. 명문가의 가난한 청년

카이사르는 율리우스 가문이라는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가문은 이미 정치적·경제적으로 쇠락한 상태였다. 가문의 명성에 비해 권력은 보잘것없었고, 청년 카이사르는 빚더미 위에 살았다. 그러나 그는 일찍부터 비범한 야심을 드러냈다. 18세에 술라(Sulla)의 정적이 되었고, 처형 위기를 가까스로 피했다. 22세에 해적에게 납치되었을 때는 자신이 요구한 몸값이 너무 적다며 두 배로 올리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풀려난 뒤에는 약속한 대로 직접 함대를 꾸려 그 해적들을 잡아 십자가형에 처했다.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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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1차 삼두정치

기원전 60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Pompeius)·크라수스(Crassus)와 비밀 동맹을 맺었다. 이른바 제1차 삼두정치다. 군사적 영웅 폼페이우스, 로마 최고의 부자 크라수스, 그리고 평민의 인기를 한 몸에 받던 카이사르. 세 사람은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며 원로원을 무력화시켰다. 카이사르는 이 동맹의 힘으로 집정관 자리에 올랐고, 임기가 끝나자 갈리아(오늘날 프랑스·벨기에·스위스 일대) 총독으로 부임했다. 평범한 정치가에게는 임기 후의 한직(閒職)이었지만, 카이사르에게는 자기 군대를 가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3. 갈리아 정복 — 알레시아의 기적

기원전 58년부터 51년까지,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을 수행했다. 8년 동안 그는 800개 도시를 공격했고, 300개 부족을 굴복시켰으며, 100만 명을 죽이고 100만 명을 노예로 팔았다고 본인이 직접 기록했다. 결정적 순간은 기원전 52년의 알레시아 전투였다. 갈리아 부족장 베르킨게토릭스(Vercingetorix)가 이끄는 8만 군대를 카이사르의 5만 군단이 포위했고, 동시에 외부에서 25만 갈리아 구원군이 카이사르를 역포위했다. 카이사르는 이중 성벽—안쪽 18km, 바깥쪽 21km—을 단 몇 주 만에 쌓아 양면 전투를 수행했고, 결국 승리했다. 이 전투로 갈리아 정복은 사실상 완료되었고, 그는 정치적·군사적으로 폼페이우스에 필적하는 거인이 되었다.

갈리아 전쟁과 알레시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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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루비콘을 건너다

그동안 로마에서는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 중 전사하면서 삼두정치는 깨졌다. 폼페이우스는 원로원과 손잡고 카이사르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단신으로 로마에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군대 없이 돌아간다는 건 곧 정치적 사형 선고였다. 기원전 49년 1월 10일, 카이사르는 갈리아와 이탈리아 본토의 경계인 루비콘 강 앞에 섰다.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는 순간 그는 국법을 어긴 반역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잠시 망설인 뒤 외쳤다. “Alea iacta est —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리고 강을 건넜다. 로마 내전의 시작이었다.

5. 파르살루스와 클레오파트라

내전은 빠르게 전개되었다. 폼페이우스는 그리스로 후퇴해 동방의 자원을 모았고, 카이사르는 이탈리아·스페인을 차례로 평정했다. 두 거인이 마주친 곳은 그리스의 파르살루스 평원(기원전 48년)이었다. 폼페이우스 군은 4만 5천, 카이사르 군은 2만 2천. 병력 면에서 압도적 열세였지만 카이사르는 기습적인 우익 돌격으로 폼페이우스의 기병대를 무너뜨렸고, 결국 완승을 거두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주했지만 그곳에서 살해당했다. 카이사르는 이집트에 도착해 클레오파트라(Cleopatra)와 만났고, 그녀를 이집트의 단독 통치자로 옹립했다. 이 만남에서 그들의 아들 카이사리온(Caesarion)이 태어났다.

6. 종신 독재관 — 황제 직전의 권력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단계적으로 권력을 집중시켰다. 기원전 46년 10년 임기 독재관, 기원전 44년에는 종신 독재관(Dictator perpetuo)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거대한 개혁을 추진했다. 율리우스력(Julian Calendar)을 도입해 1년을 365.25일로 정했고(이는 1582년 그레고리력으로 개정되기 전까지 유럽 표준이 되었다), 평민에 대한 토지 분배, 식민시 건설, 시민권 확대, 로마 항만·도로 정비 등을 단행했다. 그러나 종신 독재관이라는 자리는 공화정의 원리—’1인의 영구 권력 금지’—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원로원의 공화정 옹호파에게 그는 곧 ‘왕이 되려는 자’로 보였다.

7. 3월의 이데스 — 23번의 칼

기원전 44년 3월 15일—이른바 ‘3월의 이데스(Ides of March)‘—원로원 회의장에서 카이사르는 60여 명의 음모자에게 둘러싸였다. 그중에는 그가 아들처럼 아끼던 마르쿠스 브루투스(Marcus Brutus)도 있었다. 카이사르는 23차례 칼에 찔렸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따르면 그는 마지막 순간 브루투스를 보며 “Et tu, Brute?—브루투스, 너마저?”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음모자들이 노렸던 ‘공화정의 부활’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민들은 카이사르의 죽음에 분노했고, 내전이 다시 발발했다. 그 끝에서 카이사르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Octavianus)는 안토니우스를 누르고 최초의 황제, 즉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되었다. 카이사르가 시작한 길을 그의 후계자가 완성한 것이다.

카이사르 암살 - 23번의 칼

8. 카이사르가 남긴 것

카이사르의 유산은 단순히 한 인물의 영광에 머물지 않는다. 그가 도입한 율리우스력은 1600년 동안 유럽의 시간을 지배했고, 그의 이름 ‘Caesar’는 독일의 카이저(Kaiser), 러시아의 차르(Czar)로 변형되어 군주를 뜻하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7월(July)이라는 달 이름은 그의 이름(Julius)에서 왔다. 정치적으로 그는 로마 공화정을 끝내고 제정의 길을 열었고, 그 제국은 이후 500년간 지중해 세계를 지배했다. 한 명의 야심가가 어떻게 천 년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천 년 체제를 만들었는지—그 극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이 바로 카이사르였다. 그가 남긴 “Veni, Vidi, Vici—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는 단순한 군사 보고서가 아니라, 한 인간이 운명에 맞서는 방식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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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FAQ)

Q1. 카이사르는 황제였나요?

엄밀히 말해 황제(Imperator/Augustus)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종신 독재관(Dictator perpetuo)’이었고, 로마 최초의 황제는 그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입니다. 다만 카이사르의 권력 집중이 제정의 토대를 마련했기에 사실상의 1대 황제처럼 평가됩니다.

Q2.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기원전 49년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며 한 말로,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운명에 모든 것을 건다”는 의미입니다. 군대를 이끌고 본국으로 진군한다는 건 반역죄였기에, 이후 큰 결단을 내릴 때 비유적으로 사용됩니다.

Q3.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관계는?

정치적 동맹이자 연인 관계였습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 단독 통치자로 옹립했고, 둘 사이에 카이사리온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카이사르 사후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와 동맹을 맺었지만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면서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Q4. 율리우스력은 지금도 사용되나요?

현재 일반적으로 쓰이는 달력은 1582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도입한 그레고리력입니다. 율리우스력은 매년 약 11분의 오차가 누적되어 16세기까지 약 10일이 어긋났기 때문에 개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정교회 국가에서는 아직도 종교 행사에 율리우스력을 사용합니다.

Q5. 브루투스는 왜 카이사르를 죽였나요?

브루투스는 공화정의 가치를 신봉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에 오르며 사실상 왕이 되려 한다고 보았고, 로마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암살에 가담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공화정은 부활하지 못했고, 브루투스 자신도 2년 뒤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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