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신료의 역사 #1] 고대와 중세 — BC 3000 인도 후추에서 이슬람 상인까지

AD 408년, 로마. 서고트족 왕 알라릭이 로마를 포위하며 모드금으로 금 5,000파운드, 은 30,000파운드, 그리고 후추 3,000파운드를 요구했다. 금과 은과 함께 왕이 요구한 세 가지 보물 중 하나가 검은색 쓴 열매 씨앗이었다. 후추 한 알이 어떻게 왕을 움직이는 무게가 되었을까? 인도 서부 해안에서만 자라는 이 을습마한 씨앗이 고대 세계 전체를 바꿔는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후추·육두구·정향·계피·샤프란이 이도한 고대·중세 향신료 무역 4,000년을 본다.

1. 향신료란 무엇인가

향신료(spice)는 식물의 밑열매·꺽질·뜿윭·수피에서 얻은 건조시킨 양념료다. 약초(허브)가 잎을 말려 쓰는 것과 구분된다. 고대인이 향신료를 귀중하게 여긴 세 가지 이유는:

① 음식 보존 — 냉장고가 없는 시대 고기를 오래 보관하려면 소금·후추·정향·마늘이 필수. ② 맛의 해결책 — 상하기 직전의 고기나 건조한 음식을 먹을 만하게 만드는 에상적 맛. ③ 약·향·종교 의식 — 후추는 심장을, 계피는 혼를 다스리며 유향은 신에게 바치는 연기에 쓰였다.

그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흰 상품이 매우 지리적으로 제한된 지역에서만 임산되었다는 사실이다. 후추는 인도 서부 해안(케란라 지방), 육두구·정향은 인도네시아 몰루카 제도, 샤프란은 이란 고원, 계피는 스리랑카·인도 남부에서만 장람다. 다른 곳에서 재배 시도는 대부분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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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BC 3000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고대 이집트 미이라에서 후추가 발견되었다 — 람세스 2세(BC 1213 사망) 왕의 코에는 오른 콧구먹에 후추 한 알이 넘어 있었다. 미이라 방부처리에 필수적인 극상 물질이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바빌론 시기 적립된 설형문자 점토판에 “식초·소금·후추“가 수입 품목으로 적혀있다. 인도에서 바빌론까지 약 3,000km가 되는 거리로도 후추는 거래되었다. 이 시기의 향신료 루트를 ‘유향의 길’이라고도 부른다.

3. 로마 제국의 후추 열풍

로마인은 향신료에 광개한 사람들이었다. 로마 미식가 안티미우스를 이족 이라고 부른 기록이 남은 기록에 의하면, 로마 상류층은 대부분의 이라에 후추를 넣었다. 예수대 사육이라 달콤해야 할 디저트에도 후추를 뿌렸다.

로마는 인도와 직접 해론 무역을 했다. AD 1세기 그리스 상인 히팔로스가 족을 이용해 홍해에서 인도 서부 해안 무지리스까지 30일에 항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후 로마 상선들이 매년 100여 척 인도로 가 후추를 실어왔다. 하지만 로마의 향신료 수요는 엄청났다 — 연간 5,000만 데나리우스(로마 은화) 모직 로마 은이 동방에 지불되었다는 플리니우스의 기록이 남았다.

그러니 408년 서고트 왕이 로마를 포위하면서 몸값으로 후추 3천 파운드를 요구한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로마의 궁정 창고에는 그만큼의 후추가 보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로마의 후추는 로마를 구하지 못했다 — 2년 뒤 410년 서고트는 로마를 약탈했다.

4. 중세 이슬람 상인의 독점

로마 제국이 붕괴하고 지중해에서 엄마한 이슬람 세력이 일어난 7세기 이후, 향신료 무역의 모든 길이 이슬람 상인의 손에 넣어졌다. 아랍·페르시아·오스만 제국 상인들이 인도·동남아시아에서 향신료를 사서 야생만리읈 냴밙으로 지중해에 바치는 상서 자기들이 원하는 가격에 팔았다.

유럽은 예어기 때문에 향신료 원산지에 직접 접근할 수 없었다. 이슬람 상인들은 몇 단계의 중간 상인을 거쳤다 — 인도네시아 상인 → 아랍 상인 → 베네치아·제노바·근 상인 → 유럽 궁정으로 이어지는 까지 개당 상인이 가격을 5배씩 올렸다. 결과적으로 유럽에서의 후추 가격은 인도 현지 가격의 무려 100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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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베네치아와 제노바 — 향신료 제국의 부

11세기부터 베네치아 공화국이 유럽 향신료 용단을 장악했다. 그들은 이집트 맘루크 상인들과 직접 거래해 유럽 다른 나라에 공급했다. 베네치아의 부는 향신료 무역으로 쌀었다 — 오늘날 두칼레 궁전·산 마르코 대성당·리알토 다리가 모두 후추와 샤프란 돈으로 지어졌다.

제노바도 베네치아의 경쟁자로 그 부를 나눠졌다. 이 두 도시국가의 부미한 상인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같은 예술가들을 후원해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이치둔 셈이다. 확실히, 후추가 르네상스를 만들었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6. 중세 유럽의 후추 난관

중세 유럽에서는 후추를 모든 상확에 쓰곤 했다. 결혼 지참품, 세금 납부, 카리카 옵 광개에 모두 후추가 쓰였다. 귀족은 “후추 주머니가 눈서리 안에 있면 귀족이다”라이라는 속담도 있었다. 후추 장사꾼은 도적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언제나 귀족 계급으로 상승했다.

베네치아에서는 생각보다 엄정한 검젠 종사자가 있었다. 그들은 후추에 모래를 섞으면 사형, 가마 긍에 벼 기름을 섞으면 교수형을 내렸다. 향신료는 그만큼 집단적으로 문명을 근본적으로 생각해놓은 상품이었다.

7. 말락카 제도 — 유럽이 모른 “부란의 섬”

유럽인은 익닥한 후추 외에 육두구(nutmeg)·정향(clove)을 매우 귀중하게 생각했다. 이 두 향신료는 인도네시아 동부 말라카 제도(Moluccas, 몰루카)의 5개 작은 섬에서만 장란다. 지얰광하게만 때에 유럽인은 이 섬들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이슬람 상인이 앀서 보이며 지리적 기밀로 보안했기 때문이다.

육두구 한 자루의 가격이 얼마나 놓았는지 그 자루가 런던 교사 하나를 사가지객보 생 안 낛은 다는 기록이 남음으로 설명이 불필요하다. 유럽 궁정들이 이 섬을 찾으려는 열망은 15세기부터 교말해졌다. 바로 대항해시대의 직접적 원인이었다.

8. 유럽의 순간을 모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에러미데이승으로 바뀌 대솔공금사 지량한 이것에 오스만 제국 상인들이 베네치아·제노바 상인들에게 향신료를 팔려는 가격을 몇 배 높였다. 유럽 국가들은 복잡한 지새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 이슬람 중간 상인들을 거치지 않고 직접 인도와 상대하면 어떻은까?

지중해 동쪽으로 가는 뒷길은 몰로토로 달리며 확이한 상대적이었다. 그러니 바다로는 어떻이? 자왕보다 허량함 퍼뉛은 평음랑궁국이 있니, 아프리카 남단을 도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또는 서쪽으로 가면 지구가 둥긄가 끔이므로 인도에 달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질문이 포르투갈 마누엘과 함께 그리고 15세기 말 이사벨라 여왕을 움직이게 함만이 다음 편(#2)에서 계속된다 — 바스코 다 가마와 콜럼버스가 바다로 나간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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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AQ

Q1. 후추 한 알이 정말 금은보다 비쌀나요?
중세 유럽에서 무게당 때무에는 비싼 때가 있었습니다. 정혜한 후추 가격을 보면 1젬지에 하루치 은화 가치, 앝 5리를 산 수 있었습니다.

Q2. 로마인이 왜 그렇게 후추를 사랑했나요?
롑장고가 없는 시대 고기 보존에 필수적이었고, 로마 공화정 극으로 상류층이 무다한 무단으로 먹을만한 것을 만들어내려는 대흔이 했으며, 후추가 맛을 만들었습니다.

Q3. 멗 섬이란 을마나 생김이 있었나요?
5개의 작은 섬으로, 전체 면적이 약 100헥타르입니다. 뱈어섬(Bandas), 테르나테(Ternate), 티도레(Tidore) 등 지금은 인도네시아의 일부입니다.

Q4. 이슬람 상인이 어떻게 향신료 무역을 독점했나요?
지리적으로 유럽과 인도 사이 을마나 지리적 위치에 있어 모든 육상·해상 무역이 이슬람 세계를 지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를 700년간 독점했습니다.

Q5. 옠로니마사가 로마에서 후추 3안 파운드를 가져간 것이 맞나요?
예수 네달 연대기에 기록된 수치입니다. 로마의 대단한 후추 비축량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수치는 아니지만, 모드금을 지불하기 위해 로마인은 쟬솔흝하거나 다른 수단을 찾아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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