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인도 고고학국의 한 인도인 학자 라칼다스 바네르지(R. D. Banerji)가 파키스탄 신드(Sindh) 지방의 한 폐허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현지인들은 그곳을 ‘모헨조다로(Mohenjo-daro)‘—’죽음의 언덕‘이라 불렀다. 누구도 그곳에 무엇이 묻혀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며칠 후 발굴된 것은 충격이었다. 정확히 직각으로 교차하는 격자형 도로, 표준화된 벽돌, 거의 모든 집에 갖춰진 우물·욕실·화장실, 그리고 도시 전체에 깔린 하수도 시스템. 4,500년 전의 도시가, 21세기 현대 도시계획을 이미 실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인류 역사에서 ‘인더스 문명(Indus Valley Civilization)‘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동시대 메소포타미아·이집트와 어깨를 나란히 한 거대 문명이었고, 동시에 그 어느 문명보다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를 가장 많이 남긴 문명이었다.

1. 1922년 — “죽음의 언덕”이라 불렸던 곳
인더스 문명의 절정기는 BC 2,600~1,900년이다. 이는 이집트 기자 피라미드(BC 2,560)·메소포타미아 우르크(BC 4,000~3,100)와 동시대다. 그러나 규모는 충격적이다. 인더스 문명의 영역은 약 130만 km²—오늘날 파키스탄 전역과 인도 서북부에 걸친 광대한 지역이다. 이는 동시대 메소포타미아(약 50만 km²)나 이집트(약 30만 km²)보다 2~4배 큰 영역이었다. 발견된 도시·정착지만 1,000개 이상이며, 추정 인구는 약 500만 명에 이른다. 즉 인더스 문명은 동시대 인류 최대 문명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만큼 인더스를 알지 못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인더스 문자가 아직 해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 인더스 문명 — 동시대 최대의 광역 문명
인더스 문명을 대표하는 두 거대 도시는 하라파(Harappa)와 모헨조다로(Mohenjo-daro)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하라파 문명’이라 부르기도 한다. 두 도시는 약 600km 떨어져 있지만 도시 구조·벽돌 규격·도량형이 거의 동일하다. 강력한 표준화가 광역 영토 전체에 시행되었다는 뜻이다. 모헨조다로는 그중 가장 잘 보존된 도시로, 발굴된 면적만 약 80헥타르(축구장 110개 크기)다. 추정 거주 인구는 4만~10만 명—4,500년 전 기준으로는 메가시티였다. 도시는 두 구역으로 나뉘었다. 서쪽 높은 곳에 ‘성채(Citadel)’—공공 건물·곡물 창고·대 목욕탕이 있는 행정 구역, 동쪽 낮은 곳에 ‘하부 도시(Lower City)’—주택과 상점이 있는 거주 구역. 이는 거의 모든 인더스 도시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패턴이다.
3. 모헨조다로 — 성채와 하부 도시의 이원 구조
모헨조다로의 진짜 충격은 도시 계획의 정밀함이다. 거리는 정확히 동서남북 방향으로 직각 교차하는 격자형(Grid)이다. 폭 약 9m의 주요 도로가 도시를 큰 블록으로 나누고, 그 안에 폭 2~3m의 작은 골목이 다시 격자를 이룬다. 각 블록 안에는 표준화된 벽돌로 지은 주택들이 정연하게 배열되어 있다. 그 벽돌의 비율은 정확히 1 : 2 : 4—폭 7cm × 두께 14cm × 길이 28cm. 이 규격은 1,500km 떨어진 하라파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4,500년 전에 광역 표준 건축 코드가 시행되었다는 뜻이다. 현대 도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격자형 도시 계획—뉴욕 맨해튼, 서울 신도시—그 원형은 BC 2,600년의 인더스에서 시작되었다.
4. 격자형 도시와 표준 벽돌 — 광역 건축 코드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상하수도 시스템이다. 모헨조다로의 거의 모든 집에 우물이 있었다—총 약 700개의 우물이 발견되었다. 또한 거의 모든 집에 욕실과 화장실이 있었다. 욕실 바닥은 방수 처리된 벽돌로 되어 있고, 배수관을 통해 집 밖 하수관으로 연결되었다. 도시 거리에는 지하에 깔린 거대 하수도가 있었으며, 일정 간격으로 점검을 위한 맨홀(inspection hole)까지 있었다. 21세기 현대 도시 인프라와 거의 동일한 시스템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인도의 일부 농촌이 21세기인 지금도 화장실이 없는 가구가 많다는 점이다. 즉 4,500년 전 모헨조다로 시민이 현대 인도 농촌 일부 거주자보다 위생적으로 더 진보된 환경에 살았다는 역설적 사실이다.

5. 4,500년 전의 상하수도 — 현대 인도 농촌보다 진보
성채 구역의 가장 유명한 시설은 대 목욕탕(Great Bath)이다. 길이 12m·폭 7m·깊이 2.4m의 거대 풀(Pool)로, 방수 처리된 벽돌과 역청(아스팔트의 일종)으로 마감되었다. 옆에는 작은 개인 욕실들이 줄지어 있어, 학자들은 이를 단순한 수영장이 아니라 종교·정화 의례용 공중 시설로 본다. 후대 힌두교의 정화 의례(Ritual Bathing)의 원형으로 추정된다. 그 옆에는 거대한 곡물 창고(Granary)—50m×27m의 거대 건물—가 있어, 도시 전체를 부양할 곡물을 비축할 수 있었다. 또한 표준화된 저울추가 발견되었는데, 0.05g부터 11kg까지 13단계로 정밀하게 만들어져 있었고, 그 정확도가 99.9%에 이르렀다. 인더스인들은 이미 정밀 도량형 표준화를 시행한 첫 인류였다.
6. 대 목욕탕·곡물 창고·정밀 도량형
인더스 문명이 풀리지 않는 가장 큰 미스터리는 인더스 문자(Indus Script)다. 도장(印章, Seal)·점토판·도자기에 새겨진 약 400~700개의 기호가 발견되었지만, 21세기인 지금도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다. 비교 분석을 가능케 할 이중 언어 비문(이집트 신성문자의 로제타석 같은 것)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인더스 문자가 ① 음절문자인지, ② 표의문자인지, ③ 단순한 그림 상징인지조차 합의하지 못했다. 일부 학자(아스코 파포라 등)는 드라비다어계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결정적 증거는 없다. 만약 인더스 문자가 해독된다면, 우리는 인류 역사의 가장 큰 빈칸을 메우게 된다. 5,0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1,000년에 걸쳐 살았던 한 문명의 신화·법·정치·종교가 통째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7. 풀리지 않는 인더스 문자
인더스 문명의 또 다른 미스터리는 ‘왕도 무덤도 없다’는 점이다. 이집트엔 피라미드, 메소포타미아엔 왕궁과 지구라트가 있었지만, 인더스 문명에서는 어떤 왕궁도, 왕좌도, 호화 왕묘도 발견되지 않았다. 발견된 무덤은 모두 비슷한 크기와 부장품을 가진 평민 무덤뿐이다. 학자들은 이를 두고 ① 평등 사회였다(현대적 의미는 아니지만), ② 왕이 있었지만 우리가 그 흔적을 못 찾았다, ③ 제사장 집단이 통치한 신정 사회였다 등 다양한 설이 있다. 또한 대규모 무기·전쟁 흔적이 거의 없다는 점도 특이하다. 도시에 큰 성벽은 있지만 군사용보다는 홍수 방지용이라는 해석이 많다. 인더스 문명은 동시대 어느 문명보다 평화롭고 평등한 도시 사회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4,500년 전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진보된 사회 모델을 잃어버린 셈이다.

8. 왕이 없는 문명, BC 1,900년의 사라짐
인더스 문명은 BC 1,900년경 갑작스럽게 쇠퇴했다. 도시들이 동시에 버려지고, 인구는 시골로 흩어졌다. 원인에 대한 학설은 다양하다. ① 기후 변화·가뭄으로 농업이 무너졌다는 설, ② 인더스강 경로 변경(특히 사라스와티 강의 고갈)으로 도시가 수원을 잃었다는 설, ③ 아리아인의 침입으로 멸망했다는 설(이는 현재 학계에서 약화됨), ④ 지진과 홍수의 복합 작용. 어느 쪽이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인더스 문명은 외부 침공이 아니라 내부의 환경적·경제적 붕괴로 끝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유산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이 만든 대 목욕탕의 정화 사상은 후대 힌두교로, 격자형 도시 계획은 인류 도시 설계의 원형으로, 표준화된 도량형은 광역 무역 시스템의 모델로 살아남았다. 모헨조다로는 우리에게 한 가지 깊은 질문을 남긴다. “인류가 가장 진보된 사회를 만들었던 시기는,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전이었을지도 모른다.” 죽음의 언덕은 인류 가장 진보된 문명의 무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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