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열전 #11] 측천무후 — 중국사 4천 년, 단 한 명의 여황제

690년 9월, 66세의 한 여성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중국 역사 4천 년에 걸쳐 단 한 사람—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 그녀는 당(唐)의 14세 후궁으로 입궁해 50년 만에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왕조의 이름까지 ‘당(唐)’에서 ‘주(周)’로 바꿔버렸다. 동아시아 천 년 역사에서 여성이 정식으로 황제 칭호를 받은 사람은 그녀가 유일하다. 영광과 잔혹, 통치의 천재성과 친자녀 살해의 의혹—그녀는 천 년 동안 가장 격렬한 평가의 대상이었다.

측천무후 권력 단계

1. 산서의 상인 딸, 14세에 입궁

측천무후의 본명은 무조(武曌). 그녀가 만든 신조어 ‘조(曌, 해와 달이 하늘을 비춘다)’를 자신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산서성의 부유한 상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14세에 미모로 발탁되어 당 태종 이세민의 후궁(재인)이 되었다. 그러나 황제의 총애는 받지 못한 평범한 후궁이었다. 649년 태종이 죽자 관례에 따라 비구니가 되어 감업사로 출가했다. 보통 이라면 거기서 그녀의 인생은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그녀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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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비구니에서 황후로 — 운명의 두 번째 기회

태종의 아들 고종 이치는 아버지의 후궁이던 무조에게 오래전부터 마음을 두고 있었다. 즉위 후 그녀를 비구니에서 데려와 다시 후궁(소의)으로 들였다. 그녀는 빠르게 황제의 신임을 얻었고, 정실인 왕황후와 후궁 소숙비를 차례로 무너뜨렸다. 결정적 사건은 자신의 갓난 딸이 죽은 것을 왕황후의 짓으로 모함한 것이었다. 자기 자식을 죽여서 황후를 끌어내렸다는 의혹은 끝내 풀리지 않았다. 655년 마침내 그녀는 황후 자리에 올랐다. 30대 초반의 일이었다.

3. 이성(二聖) — 사실상 공동 통치

황후가 된 무조는 곧 정치 전면에 나섰다. 고종이 병약해지자 그녀가 직접 정사를 결재했다. 660년부터는 고종과 함께 ‘이성(二聖, 두 성인)‘이라 불리며 사실상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그동안 그녀는 정적을 제거했다. 장손무기·저수량 같은 당 건국 공신을 차례로 숙청했고, 자신의 친아들 이홍·이현마저 의문사하거나 폐위시켰다. 가족조차 권력 앞에서는 도구였다. 683년 고종이 죽자, 그녀는 황태후로서 두 아들(중종·예종)을 차례로 즉위시킨 뒤 다시 폐위시켰다. 사실상 모든 권력은 그녀의 손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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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690년, 황제로 즉위 — 무주의 시작

690년, 마침내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뎠다. 66세의 무조는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고, 국호를 ‘주(周)‘로 바꿨다. 옛 주나라(주공의 주)와 자신의 무씨가 같은 뿌리라는 명분이었다. 동시에 자신을 미륵불의 화신으로 선포하고 대운경(大雲經)을 전국에 반포했다. “여자가 황제가 되는 것은 부처의 예언이다”라는 정치적 종교화였다. 이렇게 시작된 무주(武周) 왕조는 705년까지 약 15년간 이어졌다.

무주 시대 정책

5. 과거제 확대와 안정적 통치

무주 시대의 통치는 의외로 안정적이었고 여러 면에서 진보적이었다. 그녀는 과거제를 본격 확대해 출신에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했다. 명재상 적인걸(狄仁傑), 위원충, 요숭 같은 인물이 이 시기에 배출되었다. 이들은 훗날 ‘개원의 치(開元之治)‘라 불리는 당 현종의 전성기를 만든 인적 자원이 되었다. 또한 그녀는 농업 장려, 운하 정비, 인구 조사를 시행했고, 그 결과 호적 인구가 약 380만 호에서 615만 호로 늘었다. 변경에서는 돌궐·티베트와 외교를 통해 비교적 안정을 유지했다. 한 마디로, ‘여자가 통치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사대부의 예언은 빗나갔다.

6. 혹리(酷吏)와 노년의 그림자

동시에 그녀의 통치에는 어두운 면이 있었다. 밀고 제도와 혹리(酷吏) 정치가 대표적이다. 누구든 다른 이를 고발할 수 있게 했고, 색원례·내준신 같은 잔혹한 관리들에게 정적을 처벌하게 했다. 약 15년간 적어도 수백 명의 고위 관료가 처형되거나 자살했다. 또한 노년의 그녀는 장씨 형제(장역지·장창종) 같은 젊은 미남 총신을 곁에 두며 사적 권력 남용 의혹에 휩싸였다. 705년, 적인걸의 후예들과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81세의 무황제는 황권을 아들 중종에게 양위했고, 같은 해 사망했다. 죽음 직전 그녀는 ‘황제’ 칭호를 버리고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로 돌아가 고종 곁에 묻혔다.

7. 무자비(無字碑) — 비워둔 비석

그녀의 묘 앞에는 거대한 비석이 두 개 서 있다. 하나는 고종의 것, 다른 하나는 그녀의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비석에는 한 글자도 적혀 있지 않다. 이른바 ‘무자비(無字碑)‘다. 일설에 따르면 그녀가 죽기 전 “내 공과 죄는 후세가 판단하라”며 글자를 남기지 말라 명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후대 황제들이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결론을 내리지 못해 비워 두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비석 앞에 서면 한 가지가 분명해진다. 그녀는 천 년이 지나도록 단순한 한 줄로 요약될 수 없는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측천무후 평가

8. 1300년 동안의 평가

측천무후에 대한 평가는 1300년 동안 극단을 오갔다. 송·명대 유교 사대부에게 그녀는 ‘여자가 황제가 된 끔찍한 예외’, ‘왕조 찬탈자’, ‘친자식까지 죽인 폭군’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평가는 크게 바뀌었다. 그녀가 안정적인 통치로 당의 전성기 기반을 닦았다는 점, 과거제 확대로 신진 인재를 등용했다는 점, 무엇보다 천 년 동안 단 한 사람뿐인 여성 황제로서 가지는 상징성이 재조명되었다. 마오쩌둥은 그녀를 “유능한 정치가”라 평했고, 21세기 중국에서는 드라마와 영화의 단골 주인공이다. 한 여성이 어떻게 동아시아의 가장 견고한 가부장 체제를 뚫고 정상에 올랐는가—그 답을 찾는 일은 곧 권력과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질문 중 하나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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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FAQ)

Q1. 측천무후는 정말 자기 딸을 죽였나요?

『구당서』·『신당서』·『자치통감』은 그녀가 갓난 딸을 자기 손으로 질식시켜 왕황후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이는 후대 사관이 기록한 것이며,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당시 자연사를 의도적으로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진실은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의혹은 1300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Q2. 무주(武周) 왕조는 얼마나 지속됐나요?

690년 측천무후의 즉위로 시작되어 705년 그녀의 양위로 끝나, 약 15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측천무후 한 명만의 왕조였고, 그녀가 황권을 아들 중종에게 돌려주면서 다시 당 왕조가 부활했습니다. 후세에는 무주를 별도 왕조로 보지 않고 당사(唐史)의 일부로 다루는 게 일반적입니다.

Q3. 측천문자(則天文字)는 무엇인가요?

측천무후가 자신의 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새로 만든 18~20여 자의 한자입니다. 자신의 이름 글자 ‘조(曌, 해와 달이 하늘을 비춘다)’가 대표적입니다. 그녀의 사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사라졌지만, 동시대 신라·일본 문서에도 일부 사용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Q4. 무자비(無字碑)는 어디에 있나요?

중국 산시성 셴양시의 건릉(乾陵, 고종과 측천무후의 합장릉) 입구에 있습니다. 높이 약 7.5m의 거대한 비석이지만 글자가 한 자도 없어 ‘무자비’라 불립니다. 다만 후대 송·금 시대에 다른 사람들이 새긴 낙서가 일부 남아 있어, 처음부터 빈 비석이었음이 확인됩니다.

Q5. 한국사에서 측천무후와 비교될 인물이 있나요?

한국사에는 신라 선덕여왕(632~647 재위), 진덕여왕(647~654), 진성여왕(887~897) 세 명의 여왕이 있었습니다. 다만 이들은 정상적인 왕위 계승으로 즉위한 여왕이고, 측천무후처럼 스스로 왕조를 바꿔 황제가 된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측천무후의 사례는 동아시아 전체에서도 유일무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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