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시황과 만리장성 · 📖 고조선과 비파형 동검
BC 141년, 16세의 한 소년이 한나라의 7대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유철(劉徹), 후세에 한 무제(漢武帝)라 불리는 인물이다. 그가 즉위했을 때 한나라는 안정기에 있었지만 변방은 늘 위협받고 있었다. 북쪽에는 흉노(匈奴), 동쪽에는 위만조선, 남쪽에는 남월(南越)이 한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54년 후 그가 죽었을 때 한나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광활한 동아시아 제국이 되어 있었다. 흉노를 정복하고, 실크로드를 열고,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유교를 국교로 만들고, 태학을 세워 동아시아 2,000년 통치 모델의 표준을 세웠다. 진시황이 11년 만에 천하를 통일했다면, 한 무제는 54년 동안 그 천하를 제국으로 완성시킨 인물이다. 한국사적으로도 결정적이다. 그가 BC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1. 16세 황제의 즉위 — 흉노에 대한 70년 굴욕을 끝내다
한 무제가 즉위한 시기, 한나라는 약 60년의 안정기를 보내며 국력을 충분히 축적해두고 있었다. 그러나 변방의 가장 큰 위협은 북방의 흉노(匈奴)였다. 흉노는 몽골 초원의 유목 민족으로, 빠른 기마전과 활쏘기로 한나라 국경을 끊임없이 약탈했다. 한 고조 유방(劉邦)이 BC 200년 백등산에서 흉노 묵돌 선우에게 포위당해 굴욕적 화친(和親)을 맺어야 했고, 그 이후 약 70년간 한나라는 매년 흉노에 비단·곡식·왕녀를 보내야 했다. 한 무제는 이 굴욕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BC 127년, 121년, 119년 3차에 걸친 대규모 흉노 원정에서 그는 위청(衛靑)·곽거병(霍去病)이라는 두 천재 장군을 발탁했다. 특히 곽거병은 18세에 처음 출전해 24세까지 6년 동안 흉노를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그 결과 흉노는 고비 사막 북쪽으로 밀려났고, 한나라는 마침내 북방의 위협에서 해방되었다.
2. 장건의 13년 — 실크로드의 의외의 발견
흉노 정복의 일환으로 한 무제는 또 하나의 거대한 외교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장건(張騫)의 서역 사절이다. BC 138년, 한 무제는 장건에게 흉노 서쪽의 대월지국(大月氏國)—흉노에게 쫓겨난 부족—과 군사 동맹을 맺어 흉노를 양면 공격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장건 일행 100여 명은 장안을 떠나 서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곧 흉노에 잡혀 10년간 억류되었다. 그곳에서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지만, 그는 한나라의 사명을 잊지 않았다. 10년 후 탈출해 마침내 대월지국에 도착했다. 그러나 대월지국은 이미 정착해 평화롭게 살고 있어 동맹 제안을 거부했다. 장건은 BC 126년 빈 손으로 귀국했지만—단 2명의 일행만 살아 돌아왔다—그가 가져온 정보는 인류 역사를 바꿨다. 서역에 거대한 문명들—파미르 너머 페르가나, 박트리아, 인도, 페르시아, 그리고 로마까지—이 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한나라에 알려진 것이다. 이것이 실크로드(Silk Road)의 시작이다.

3. 비단·차 ↔ 포도·말 — 동·서양의 첫 만남
실크로드 개통의 영향은 단순한 무역 이상이었다. 한나라 비단·차·도자기가 서역을 거쳐 로마 제국까지 갔고, 서역의 포도·말·향료·유리·불교가 한나라로 들어왔다. 로마 황실에서는 한나라 비단을 “세리쿰(Sericum)”이라 불렀고, 그 가격이 황금보다 비쌌다. 한 무제 시대 이후 약 1,500년 동안 실크로드는 동·서양 문명 교류의 핵심 통로가 되었다. 또한 BC 102년 한 무제는 페르가나(현 우즈베키스탄)의 대완국(大宛國) 한혈마(汗血馬)—피땀을 흘리며 달린다는 천리마—를 얻기 위해 두 차례 원정군을 보냈다. 결국 천 마리의 한혈마를 얻어 한나라 기병대의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이는 단순한 말 무역이 아니라 동아시아 군사사의 전환점이었다.
4. 유교 국교화와 태학 — 동아시아 2,000년 통치 모델
한 무제의 또 다른 거대 사업이 유교 국교화다. 그 이전 한나라는 황로(黃老) 사상—노자와 황제의 무위(無爲) 통치—을 기본 이념으로 했다. 그러나 한 무제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위해 새로운 이념이 필요했다. BC 134년, 유학자 동중서(董仲舒, BC 179~104)가 황제에게 건의했다. “모든 학파를 폐하고 오직 유가(儒家)만을 존중하소서. 그러면 국가의 통치 이념이 통일됩니다.” 한 무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유교가 동아시아 2,000년 동안 국가 통치 이념이 되었다. 동시에 한 무제는 BC 124년 태학(太學)을 설립했다. 황실 직속 대학으로 오경박사(五經博士)가 학생들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쳤고, 졸업생은 관리로 임용되었다. 이것이 후일 수·당대 과거제(科擧制)의 직접적 원형이 되었다. 즉 한 무제는 단순히 유교를 국교로 만든 게 아니라, ‘학문으로 관리를 뽑는’ 동아시아 인재 등용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5. BC 108년 — 고조선 멸망과 한사군 설치
그러나 한 무제의 통치는 한국사적으로 결정적 비극을 낳았다. BC 109년, 그는 위만조선의 우거왕(右渠王)이 한나라의 외교 사신을 살해한 것을 빌미로 침공을 결정했다. 약 7만 대군이 수륙 양면으로 한반도를 향했다. 위만조선은 약 1년 동안 강력히 저항했고, 한군은 두 명의 장군이 서로 모함해 처벌받을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결국 내부 분열로 BC 108년 수도 왕검성이 함락되었다. 우거왕은 부하에게 살해당했고, 약 2,000년에 걸친 고조선의 역사가 막을 내렸다. 한 무제는 그 자리에 한사군(漢四郡)—낙랑(樂浪)·진번(眞番)·임둔(臨屯)·현도(玄菟)—을 설치했다. 이 중 낙랑은 AD 313년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약 420년간 평양 일대에 존속했다. 한국사에서 한 무제는 정복자였지만, 동시에 한반도에 한자·유교·금속 기술 등 한문화를 본격적으로 전파한 인물이기도 했다. 평가가 양면적인 이유다.
6. 폭정의 그림자 — 무고의 화와 사마천의 궁형
한 무제의 통치는 후기로 갈수록 어두워졌다. 끝없는 정복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났고, 그 손실을 메우기 위해 소금·철 국가 전매(鹽鐵專賣)를 시행했다. 이는 민간 자본을 위축시켰고,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또한 그는 만년에 불로장생에 집착했다. 진시황과 똑같이 도사와 방사(方士)에게 둘러싸여 신선의 약을 찾았고, 산둥반도와 봉선(封禪) 의식을 거행하며 거대한 비용을 지출했다. 무고(巫蠱)의 화(禍)—BC 91년 미신적 저주를 두고 일어난 정치 숙청 사건—로 황태자 유거(劉據)와 그의 가족이 모두 죽었고, 수십만 명이 처형되었다. 후세 사가들은 한 무제를 “위대한 정복자이자 잔혹한 폭군”의 양면적 인물로 평가한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는 한 무제 시대에 완성되었지만, 사마천 자신이 흉노 항복 장수 이릉(李陵)을 변호했다가 한 무제의 명령으로 궁형(宮刑, 거세)을 당하기도 했다.
7. 70세의 죽음 — 무릉에 남긴 거대 제도
BC 87년, 한 무제는 70세로 사망했다. 그는 자기가 즉위했을 때 한나라 영토의 약 2배를 통치했고, 인구는 약 5,000만 명에 이르렀다. 사후 그는 무릉(茂陵)에 거대한 무덤을 만들어 묻혔다. 그러나 그가 남긴 진짜 유산은 무덤이 아니라 제도였다. ① 유교 국교화 → 동아시아 2,000년 가치 체계, ② 태학·5경박사 → 과거제·관료제의 원형, ③ 실크로드 → 동·서양 문명 교류의 시작, ④ 흉노 정복 → 만리장성 이후 북방 안정, ⑤ 군현제 완성 → 광역 행정의 모델, ⑥ 소금·철 전매 → 국가 경제 통제의 원형. 이 모든 것이 후일 한반도·일본·베트남에 그대로 전해져 동아시아 공통 문명권의 기초가 되었다. 한국의 조선 왕조, 일본의 율령 국가, 베트남의 응웬 왕조—모두 한 무제가 만든 모델의 변형이었다.
8. 한 사람이 만든 동아시아 2,000년의 표준
한 무제는 한국사 입장에서는 양면적 인물이다. 한편으로는 고조선을 멸망시킨 정복자—한국 첫 국가의 종결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반도에 한자·유교·금속기술을 본격 전파한 문명의 매개자이기도 했다. 그가 설치한 낙랑군이 한반도에 약 420년간 존속하면서 한국은 본격적으로 동아시아 문명권에 편입되었다. 한자가 한반도에 들어왔고, 유교 경전이 들어왔고, 한문 기록 문화가 들어왔다. 후일 광개토대왕비(414)에 한자로 새겨진 비문도, 신라의 향가도, 조선의 한문 문집도—모두 한 무제가 만든 한자 문명권의 결과물이다. 동시에 한 무제의 정복으로 한반도는 고조선 멸망 후 약 4세기에 걸친 정치적 공백기를 거치며 부여·고구려·삼한이라는 새로운 정치체로 재편되었다. 즉 한 무제는 한국사의 한 시대를 끝낸 사람이자, 동시에 다음 시대를 시작하게 만든 사람이다. 그의 54년 통치가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아는 한국·중국·일본 모두 매우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 고구려 건국과 주몽 — 고조선 멸망 직후 만주에서 일어난 새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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