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5세기 그리스 아테네. 인구 30~40만 명의 작은 도시국가가 그 후 2,500년에 걸쳐 인류 문명을 흔들 사상·예술·정치 체제를 한꺼번에 만들어냈다. 민주주의(Democracy)라는 단어, 철학(Philosophy)이라는 학문, 비극(Tragedy)이라는 예술 형식, 역사(History)라는 학문 분야—이 모든 것이 그 한 세기 한 도시에서 탄생했다. 그 황금기의 한가운데에 한 정치가가 있었다. 페리클레스(Pericles, BC 495경~429). 그는 약 30년 동안 사실상 아테네를 이끌었고, 그가 통치한 시기를 학자들은 ‘페리클레스의 황금기(Periclean Golden Age)’라 부른다. 한반도에서는 삼한(三韓)이 막 형성되던 시기, 지구 반대편에서는 인류 정치사의 가장 위대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1. 페르시아 전쟁 승리 → 아테네 패권의 시작
페리클레스의 등장 배경을 이해하려면 그 직전 사건—페르시아 전쟁(BC 499~449)—을 먼저 알아야 한다. 당시 지구상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던 페르시아가 두 차례에 걸쳐 그리스 폴리스 연합을 침공했다. BC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 1만 명이 페르시아 2만 5천 명을 격파했고, BC 480년 살라미스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 약 200척이 페르시아 600척을 궤멸시켰다. 이 두 번의 기적적 승리로 그리스는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아냈고, 아테네는 그 영웅이 되었다. 전쟁 후 아테네는 200여 개 폴리스의 동맹을 주도하는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의 맹주가 되었고, 동맹의 공물(貢物)은 아테네 국고로 모였다. 페리클레스는 바로 이 시기 BC 461년 권력의 정점에 올라, 그 후 32년간 아테네를 이끌었다.
2. 일당 지불제 — 가난한 시민도 정치에 참여하게 한 결정타
페리클레스가 시행한 가장 혁명적 정책은 ‘직접 민주주의(Direct Democracy)’의 완성이었다. 그 핵심은 세 가지 기구였다. ① 민회(Ekklesia, 에클레시아)—아테네 전체 시민 약 4만 명이 모이는 최고 의결 기구로, 프닉스 언덕에서 매월 4회 회의가 열렸다. 모든 시민이 발언할 수 있고 1인 1표로 결정했다. ② 500인 평의회(Boule, 불레)—10개 부족에서 추첨으로 50명씩 뽑은 1년 임기 행정·입법 준비 기구. ③ 시민법정(Dikasterion)—추첨된 6,000명의 시민 풀에서 사건마다 201~501명의 배심원을 뽑아 다수결로 판결했다. 페리클레스는 여기에 결정적 개혁을 더했다. ‘일당 지불제(Misthos)’—공직자와 배심원에게 하루 보수를 지급한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그 전까지는 부자만이 시간을 들여 공직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보수가 지급되면서 가난한 시민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한 가지 정책이 직접민주주의를 완성한 결정타였다.

3. “시민”의 좁은 범위 — 인구의 10~15%만이 정치 참여
그러나 아테네 민주주의에는 결정적 한계가 있었다. ‘시민(politai)’의 범위가 매우 좁았다는 점이다. 시민의 자격은 ① 20세 이상 성인 남성, ② 양 부모 모두 아테네 시민이어야 함. 이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은 아테네 인구 30~40만 명 중 약 4만 명, 즉 약 10~15%에 불과했다. 나머지 85~90%는 정치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배제된 집단은: 여성(인구의 절반)·노예(약 8~10만 명, 인구의 약 25%)·메토이코이(외국인 거주자 약 3~4만 명)·미성년자. 흥미롭게도 페리클레스 본인이 BC 451년 시민권법을 더 엄격하게 만들어 양 부모 모두 시민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추가했다. 이는 시민의 범위를 더 좁혔다. 즉 아테네 민주주의는 “엘리트 남성들만의 직접 민주주의”였다. 그러나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민이라는 개념과 1인 1표 원칙은 후일 미국·프랑스 혁명을 거쳐 인류 보편의 정치 체제로 확산되었다.
4. 아크로폴리스 재건 — 동맹 공물로 지은 파르테논
페리클레스가 남긴 가장 가시적 유산은 아크로폴리스(Acropolis) 재건이다. BC 480년 페르시아 침공 때 파괴된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신전들을 그는 약 30년에 걸쳐 다시 지었다. 그 중심에 파르테논 신전(Parthenon)—여신 아테나에게 바쳐진 도리아식 신전이 있었다. BC 447~432년, 약 15년의 공사 끝에 완성된 이 신전은 가로 70m·세로 31m, 46개의 도리아식 기둥을 가진 거대 건축물이었다. 건축가는 익티노스(Iktinos)와 칼리크라테스(Kallikrates), 조각가는 페이디아스(Phidias)—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올림피아 제우스상의 작가였다. 파르테논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아테네 민주주의의 시각적 선언이었다. 신전 안에는 약 11m 높이의 황금·상아 아테나 여신상이 서 있었고, 외벽에는 그리스인과 야만족의 전투를 새긴 부조들이 펼쳐져 있었다. 그 건축비는 델로스 동맹의 공물에서 충당되었다—이는 아테네가 동맹의 돈을 자기 도시 미화에 썼다는 논란을 낳기도 했다.
5. 인류 사상의 폭발 — 한 도시에서 동시에 태어난 8명의 거인
페리클레스 시대에 아테네는 ‘인류 사상의 폭발’이라 부를 만한 시기를 맞았다. ① 비극(Tragedy): 아이스킬로스(525~456)·소포클레스(497~406)·에우리피데스(480~406)—세 명의 비극 작가가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경쟁하며 오이디푸스 왕·안티고네·메데이아·트로이의 여인들 같은 영원한 작품을 남겼다. ② 역사(History): 헤로도토스(484~425)가 페르시아 전쟁사를 다룬 『역사(Historiai)』를 썼다—그래서 그는 ‘역사의 아버지’로 불린다. 같은 시기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썼다. ③ 철학(Philosophy): 소크라테스(469~399)가 아테네 거리에서 시민들과 문답으로 진리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의 제자 플라톤(427~347)과 손자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384~322)가 그 흐름을 이어 서양 철학을 만들었다. ④ 의학(Medicine): 히포크라테스(460~370)가 ‘병은 신의 벌이 아니라 자연 현상’이라는 혁명적 사상을 펼쳤다—오늘날 모든 의사가 졸업식에서 낭독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그 사람이다. ⑤ 건축·조각: 페이디아스를 비롯한 조각가·건축가들이 인류 예술의 새로운 표준을 세웠다.

6.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페스트 — 66세에 죽다
페리클레스의 통치는 영원하지 않았다. BC 431년, 아테네의 패권에 위협을 느낀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이끌고 아테네에 선전포고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그리스 내전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의 시작이다. 페리클레스의 전략은 명확했다. ① 아테네는 해전에 강하니 바다에서 싸우고, ② 스파르타는 육전에 강하니 육지 전투를 피하며, ③ 시민과 농민을 모두 아테네 성벽 안으로 피신시킨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좁은 성벽 안에 밀집해 살자 BC 430년 끔찍한 페스트(역병)가 발생했다. 약 1년 사이에 아테네 인구의 1/4~1/3이 죽었고, 페리클레스 자신도 BC 429년 페스트로 사망했다. 향년 66세. 그가 죽은 후 아테네는 점차 흔들렸고, 결국 BC 404년 스파르타에 항복했다. 아테네의 황금기는 페리클레스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
7. 장례 연설 — 링컨 게티즈버그의 직접적 원형
페리클레스가 BC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첫 해 전사자 추도식에서 한 ‘장례 연설(Funeral Oration)’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 연설 중 하나로 꼽힌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그대로 기록된 이 연설에서 페리클레스는 아테네를 이렇게 정의했다. “우리의 정치 체제는 이웃 나라들의 어떤 것도 모방하지 않는다. 우리는 본보기이며, 모방의 대상이지 누구를 모방하는 자들이 아니다. 우리 체제의 이름은 ‘민주정’이다. 권력이 소수가 아니라 다수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이 연설은 후일 미국 링컨 대통령의 게티즈버그 연설(1863년)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링컨의 유명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는 페리클레스 장례 연설의 21세기 한국식 번역에 가깝다. 즉 페리클레스의 한 연설이 2,300년 후 미국 민주주의의 핵심 선언이 된 셈이다.
8. 한 도시국가가 만든 2,500년의 인류 유산
아테네의 영광은 짧았다. 페리클레스가 죽은 BC 429년부터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항복한 BC 404년까지 단 25년 만에 황금기는 무너졌다. 그러나 그 짧은 한 세기—BC 5세기 아테네—가 인류 문명에 남긴 것은 2,500년을 살아남았다. 우리가 오늘 ‘민주주의’라 부르는 정치 체제, ‘철학’이라 부르는 학문, ‘역사’·’비극’·’의학’이라 부르는 거의 모든 인문학의 시작이 그 한 도시에서 만들어졌다. 페리클레스라는 한 사람이 그 폭발의 한가운데에 있었고, 그가 만든 직접 민주주의는 비록 시민의 범위가 좁은 한계가 있었지만 인류가 처음으로 ‘평민도 정치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을 시험해본 거대한 실험이었다. 한반도의 삼한이 농경 사회의 작은 군장들에 의해 다스려지던 그 시기에, 지구 반대편에서는 4만 명의 시민이 직접 손을 들어 자기 도시의 미래를 결정하고 있었다. 페리클레스가 BC 431년 장례 연설에서 한 말은 오늘날까지 모든 민주국가가 추구하는 이상이다. “우리는 정치에 무관심한 자를 ‘쓸데없는 사람’이라 부른다.” 2,500년 전 그가 던진 메시지는 21세기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