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221년, 한 사람이 중국 전체를 자기 발 아래 두었다. 그의 이름은 영정(嬴政)—후일 우리가 ‘진시황(秦始皇)’으로 부르는 인물이다. 그때 그의 나이 38세였다. 그 직전 500년 동안 중국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BC 770~221)—수십 개의 나라가 서로 죽고 죽이는 분열의 시대였다. 그러나 진(秦)이라는 서쪽 변방국의 한 군주가 단 11년 만에 한·조·위·초·연·제 6국을 차례로 정복하고, 마침내 천하를 통일했다. 그가 만든 새 칭호 ‘황제(皇帝)’는 그 후 2,132년 동안 중국 통치자의 공식 호칭이 되었다. 그가 쌓은 만리장성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토목 사업이었고, 그가 만든 병마용은 1974년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 우연히 발견한 후 20세기 최대 고고학 발견이 되었다. 한국사에서는 비슷한 시기 고조선이 멸망(BC 108)하는 격동 속에서, 동아시아 전체를 바꾼 한 사람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1. 춘추전국 500년 분열의 끝 — 진의 11년 통일
진시황이 통일하기 전 중국은 ‘전국 7웅(七雄)’—7개 강대국이 패권을 다투던 시대였다. 진(秦)·초(楚)·연(燕)·제(齊)·한(韓)·조(趙)·위(魏). 이들은 250년에 걸쳐 끊임없이 서로 공격했고, 그 사이에 손자(孫子)·노자(老子)·공자(孔子)·맹자(孟子)·한비자(韓非子) 같은 사상가들이 어떻게 하면 이 혼란을 끝낼 수 있을지 답을 찾으려 했다. 결국 답을 낸 것은 사상이 아니라 무력이었다. 서쪽 변방 진(秦)나라는 BC 4세기 상앙(商鞅)의 법가(法家) 개혁으로 ① 신상필벌의 엄격한 법, ② 군공(軍功)에 따른 신분 상승, ③ 토지·인구 통제 강화를 시행해 가장 강력한 전쟁 기계가 되었다. 영정은 13세에 진왕에 즉위해(BC 246) 38세에 6국을 모두 정복했다(BC 221). 500년 분열을 11년 만에 끝낸 것이다.
2. “황제(皇帝)”의 탄생과 군현제·도량형 통일
통일 직후 영정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새 칭호를 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신하들에게 말했다. “왕(王)이라는 칭호는 너무 평범하다. 나는 삼황(三皇)의 덕(德)과 오제(五帝)의 공(功)을 겸했으니, ‘황제(皇帝)’라 부르라.” 그리고 자기를 ‘시황제(始皇帝, 첫 황제)’로, 후계자들을 차례로 2세·3세·만세까지 부르라고 했다. 그의 자신감은 끝이 없었다. 그가 새로 만든 ‘황제’ 칭호는 그 후 2,132년 동안—1912년 청 왕조 마지막 황제 푸이가 폐위될 때까지—중국 통치자의 정식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그는 통일 직후 가장 시급한 과제를 시행했다. 광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① 군현제(郡縣制)—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황제가 직접 임명한 관리가 다스리는 중앙집권 체제, ② 도량형 통일—길이·무게·부피의 단위 통일, ③ 문자 통일—’소전(小篆)’ 서체로 표준화, ④ 화폐 통일—’반량전(半兩錢)’으로 일원화, ⑤ 도로망—전국을 잇는 ‘치도(馳道)’ 건설. 단 11년의 통치 동안 이 모든 것이 시행되었다.
3. 만리장성 — 흉노를 막기 위한 5,000km 토성
진시황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북방 흉노(匈奴)의 침입이었다. 흉노는 몽골 초원의 유목 민족으로, 빠른 기마전과 활쏘기로 중국 농경지를 끊임없이 약탈했다. 통일 후 진시황은 장군 몽염(蒙恬)에게 30만 대군을 주어 흉노를 북쪽으로 밀어내게 했고, 동시에 BC 215년부터 거대한 토목 사업을 시작했다. 이미 전국시대에 각국이 따로 쌓아 둔 북방 장벽들을 하나로 연결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시작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우리가 지금 보는 그 모습은 아니다. 진대(秦代) 장성은 흙과 자갈로 다져 쌓은 토성(土城) 위주였고, 약 5,000km 정도였다. 우리가 지금 베이징 근교에서 보는 화려한 벽돌 장성은 1,500년 후 명나라(1368~1644)가 다시 쌓은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만리장성의 원형이 진시황 시대에 만들어졌다. 당시 동원된 인력은 약 30~40만 명, 추정 사망자는 100만 명 이상이었다. 만리장성의 모든 벽돌 아래에는 한 사람의 시신이 묻혀 있다는 말이 괜한 게 아니었다.

4. 만리장성의 한계 — 1644년 산해관이 열린 날
만리장성의 효용성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논쟁이 있어 왔다. 정말 흉노를 막았을까? 답은 양면적이다.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었지만, 장기적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만리장성이 있었기 때문에 흉노는 대규모 침공을 단념하고 작은 약탈에 그쳤다. 그러나 흉노가 정말 침공하려고 마음먹으면 만리장성은 무력했다. 가장 극적인 사례가 1644년 명나라 멸망이다. 명말 농민 반란군 이자성(李自成)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산해관(山海關, 만리장성 동쪽 끝)을 지키던 명나라 장군 오삼계(吳三桂)가 청나라에 항복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청군은 만리장성을 단 한 번도 공격할 필요 없이 그냥 걸어서 통과해 베이징에 입성했다. 마오쩌둥은 1937년 만리장성을 답사한 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리장성은 위협을 막은 것이 아니라, 위협을 늦췄을 뿐이다.” 그러나 늦췄다는 것 자체가 중국 농경 문명에는 결정적 시간이었다.
5. 진시황릉 — 36년 동안 70만 명이 지은 지하 천하
진시황의 가장 거대한 토목 사업은 만리장성이 아니라 자신의 무덤이었다. 그는 13세 진왕에 즉위한 해(BC 246)부터 사망(BC 210)까지 무려 36년 동안 자기 무덤을 짓게 했다. 즉위 때부터 자기 죽음을 준비한 셈이다. 동원된 인력은 약 70만 명—만리장성보다 많았다. 무덤의 봉분 높이는 약 76m(24층 빌딩 높이), 외성벽 둘레 6km, 면적 약 56km²의 거대한 지하 도시였다. 사기(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무덤 내부에는 수은(水銀)으로 만든 천하의 강과 바다가 흐르고, 천장에는 진주로 만든 별과 달이 박혀 있다고 한다. 또한 무덤이 도굴되지 않도록 무덤을 만든 장인들을 무덤 안에 함께 묻어 모두 죽였다. 이 사기의 기록은 오랫동안 과장으로 여겨졌지만, 1980년대 위성 측정 결과 진시황릉 봉분 위 토양에서 비정상적으로 높은 수은 농도가 검출되었다. 사기의 기록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그러나 봉분 내부는 아직 미발굴이다. 중국 정부는 발굴 시 유물 보존이 어렵다는 이유로 발굴을 미루고 있다.

6. 1974년 우물 — 농부가 발견한 8,000명의 흙 군대
1974년 3월 29일,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근교의 한 농부 양지파(楊志發)가 우물을 파다 흙 속에서 거대한 도자기 머리를 발견했다. 그것은 인류 20세기 최대 고고학 발견의 시작이었다. 발굴 결과 그곳에서 약 8,000명의 실물 크기 도자기 병사들이 줄지어 묻혀 있는 것이 드러났다. 진시황릉 동쪽 1.5km 지점, 진시황의 사후 천하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병마용(兵馬俑)이었다. 각 도자기 병사는 모두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실제 진나라 병사들을 모델로 개별 제작한 것이다. 약 670개의 도자기 말, 100여 대의 전차도 함께 발굴되었다. 본래는 화려한 색깔로 채색되어 있었지만 2,200년의 시간 동안 색이 사라졌다. 이 발견으로 인류는 진시황 시대 중국 군대의 실제 모습—갑옷의 디테일, 무기의 형태, 병사들의 표정까지—을 그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현재 시안의 핵심 관광지로 연 600만 명이 방문한다.
7. 분서갱유와 수은 중독 — 50세의 죽음
진시황의 통치는 강력했지만 잔혹했다. 가장 유명한 폭정 사건이 분서갱유(焚書坑儒)다. BC 213년 분서(焚書, 책을 태우다)—농서·의서·점복서를 제외한 모든 책, 특히 유가(儒家) 경전과 6국의 역사서를 모두 불태우게 했다. 한 해 후 BC 212년 갱유(坑儒, 학자를 묻다)—그에게 비판적이던 유생(儒生) 460여 명을 산 채로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이 두 사건은 진나라가 망한 후 한나라 학자들이 진시황을 ‘폭군’으로 기록하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또한 그는 자기 죽음을 두려워해 불로초(不老草)를 찾으러 한반도·일본까지 사신을 보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서복(徐福) 일행 3,000명의 동방 여행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BC 210년, 50세의 나이로 5차 동순(東巡) 중 산둥성 사구(沙丘)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학자들 사이에서 ‘수은 중독설’이 유력하다. 그가 불로장생을 위해 매일 마셨던 수은 약(丹藥)이 오히려 그를 죽인 것이다. 진(秦) 왕조는 그의 사후 단 4년 만에 농민 반란으로 무너졌고, BC 206년 한(漢) 유방이 천하를 다시 통일했다. 진시황의 천하 통일은 11년이었고, 그가 만든 진 왕조는 15년 만에 사라졌다.
8. 한 사람이 만든 2,000년의 동아시아
진시황은 한국사에서도 무관하지 않다. 그가 통일한 BC 221년은 한반도에서 고조선 후기—위만조선이 막 들어서기 직전이었다. 그가 동방으로 보낸 서복 일행은 한반도와 일본을 떠돌았다는 전설이 있고, 그가 만든 군현제는 후일 한사군(BC 108)의 모델이 되었다. 즉 진시황은 동아시아 전체의 정치 모델을 바꾼 사람이다. 그의 평가는 2,200년이 지난 지금도 양면적이다. 한편에서는 500년 분열을 끝내고 중국을 하나로 만든 통일 영웅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분서갱유로 학문을 탄압하고 만리장성으로 백성을 죽음에 몰아넣은 폭군이다. 마오쩌둥은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라 평가했지만, 한 역사가는 “진시황의 모든 것은 위대했고, 동시에 모든 것은 잔혹했다“고 썼다. 그가 만든 황제 체제는 2,000년을 살았고, 그가 쌓은 만리장성은 지금도 베이징 외곽에 서 있으며, 그가 만든 병마용 8,000개는 시안의 흙 속에서 영원히 그를 지키고 있다. 한 사람이 어떻게 한 문명의 모양을 결정했는지를 보여주는 인류사 가장 강력한 사례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