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22일, 최동훈 감독의 《암살(Assassination)》이 개봉했다. 1,270만 관객—한국 영화 역대 흥행 5위—이라는 거대한 성공은 단순히 잘 만든 액션 영화여서가 아니었다. 이 영화는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외면했던 한 가지 불편한 진실—“왜 1945년 해방 후 친일파가 처벌받지 않았는가”—을 정면으로 묻는 작품이었다. 1933년 경성을 배경으로 한 한 작전 이야기, 그 작전에 가담한 안옥윤·하와이 피스톨·속사포—모두 가공 인물이지만, 영화 속에 등장하는 김원봉·김구·이봉창·윤봉길은 모두 실존 인물이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것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보여주는 친일파의 해방 후 모습이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진실이었다는 점이다.

1. 1933년 — 만주사변 후 독립운동의 3대 무대
영화의 배경 1933년은 일본 식민지 통치 23년차, 만주사변(1931)·만주국 수립(1932) 이후 일본 군국주의가 본격화되던 시기다. 한반도 안에서 항일 무장 투쟁은 거의 불가능했고, 독립운동의 무대는 만주·중국·미주로 옮겨졌다. 만주에서는 김원봉의 의열단(義烈團, 1919년 결성)과 김좌진·홍범도의 무장 독립군이 활동했고, 상해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김구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1931년 결성)이 있었으며, 미주에는 박용만의 대조선국민군단과 안창호의 흥사단이 활동했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이 세 무대에서 모두 모인 인물들이다. 안옥윤은 만주 한국독립군 소속, 하와이 피스톨은 미주에서 온 청부살수, 속사포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합류한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이는 1930년대 독립운동의 실제 지리적 분포를 잘 반영한 설정이다.
2. 안옥윤 — 남자현과 박차정이 결합된 가공 인물
영화의 핵심 인물 안옥윤(전지현 분)은 가공 인물이지만, 그 모티프가 된 실제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남자현(南慈賢, 1872~1933)은 만주에서 활동한 양반 출신 여성 독립운동가로, 1933년 일본 만주국 전권대사 부토 노부요시(武藤信義)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어 옥사했다. 영화의 시점인 1933년 그녀는 실제로 그 작전을 시도한 사람이다. 박차정(朴次貞, 1910~1944)은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부인이자 자신도 의열단원으로 활동했다. 안옥윤의 군복 차림과 저격 능력은 박차정과 남자현 두 사람의 이미지가 결합된 것이다. 영화에서 안옥윤의 쌍둥이 동생(미츠코)이 친일파 가문에 입양되어 자란다는 설정은 가공이지만, 가족이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로 갈라진 사례는 실제로 많았다. 김구의 아들 김인이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다 일찍 죽은 사례, 윤봉길의 가족이 일본 경찰에 시달린 사례 등이 있다.

3. 김원봉 — 일본이 가장 두려워한 한국인
영화에 카메오로 등장하는 김원봉(조승우 분)은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실존 인물이다. 의열단 단장으로 1919~1930년대 일본 요인 암살·시설 파괴를 주도했고, 영화의 작전을 후원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1898년 경남 밀양 출생, 1919년 22세에 의열단을 조직해 1926년까지 약 30여 회의 의거를 주도했다. 일본은 그에게 100만 원의 현상금을 걸었다(당시 김구 60만 원, 안창호 30만 원). 즉 김원봉은 일본이 가장 두려워한 한국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해방 후 좌익(조선의용대 계열)으로 분류되어 남한에서 박해받았고, 1948년 월북했다. 1958년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어 죽었다. 남에서도 북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비극의 인물이었다. 그래서 2005년까지 한국 정부는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영화 《암살》이 그를 카메오로 등장시킨 것은 잊혀진 영웅을 다시 호명하는 의미가 있었다.
4. 염석진과 밀정 — 1930년대의 가장 어두운 면
영화의 또 다른 핵심 인물 염석진(이정재 분)은 가공 인물이지만, 그의 모티프인 ‘변절자’는 1930년대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어두운 한 면이다. 일제는 독립군 내부를 와해하기 위해 ‘밀정(密偵)’을 매수했다. 한때 동지였던 자들이 돈·여자·생명의 위협 앞에 변절하여 동료를 일본에 팔아넘기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황옥(黃鈺)이다. 그는 의열단의 핵심 단원이었지만 일본 경찰의 회유로 변절해, 1923년 김상옥 종로경찰서 폭탄 의거 후 단원들을 일본에 밀고했다. 영화 속 염석진이 일본 경찰에 의열단원의 위치를 알려주는 장면은 이런 실제 밀정 사건들의 결합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해방 후 친일파 청산 재판에서 염석진이 무죄로 풀려나는 장면—은 가공이지만, 그 정확한 모티프는 1948~1949년 ‘반민특위(反民特委) 좌절 사건’이다.
5. 반민특위 좌절 — 영화 결말의 진짜 모티프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1948년 9월 친일파 청산을 위해 제헌국회가 설치한 기구다. 1949년까지 약 680명의 친일 부역자를 조사·구속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이승만 대통령의 비호 아래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결국 반민특위는 1949년 8월 강제 해산되었다. 실제 처벌받은 친일파는 단 7명, 그나마 모두 단기형이나 무죄로 풀려났다. 즉 한국은 친일파 청산에 사실상 실패한 나라다. 이것이 영화 《암살》의 결말이 그토록 강렬한 이유다. 영화 속 염석진이 무죄로 풀려나 부유하게 사는 장면은 정확히 한국 현대사의 진실이다. 영화 마지막 안옥윤이 노년의 염석진을 찾아가 사살하는 장면은 가공이지만, 그것은 역사가 처벌하지 못한 것을 영화가 처벌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1,270만 관객이 그 장면에 박수친 이유가 거기에 있다.

6. 윤봉길 의거의 1933년판 재현
영화는 1932년 윤봉길 의거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 분위기를 영화 전반에 깔고 있다.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김구의 한인애국단 단원 윤봉길(尹奉吉, 24세)이 도시락 폭탄을 던져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 등을 폭사시킨 사건이다. 이 의거로 ① 장개석이 한국 임시정부에 정식 지원을 시작했고, ② 한국 독립운동의 국제적 위상이 크게 올라갔으며, ③ 김구는 일본의 1순위 표적이 되어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영화 속 안옥윤의 작전 계획—친일파 강인국과 일본군 사령관 가와구치 마모루를 동시에 암살하려는—은 윤봉길 의거의 패턴을 그대로 따른다. 도시락이 아닌 권총·폭탄을 사용하고, 표적이 일본 대장이 아닌 사령관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즉 영화의 가상 작전은 윤봉길 의거의 1933년판 재현인 셈이다.
7. 1,270만 관객이 박수친 진짜 이유
《암살》이 한국 사회에 던진 메시지는 단순한 항일 액션을 넘어선다. 영화의 진짜 주제는 “한국은 친일파를 처벌하지 못한 나라다”라는 불편한 진실이다. 영화 개봉 당시 한 평론가는 이렇게 썼다. “최동훈은 액션 영화의 외양을 빌어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미해결 과제를 다시 꺼냈다.” 실제 영화 개봉 후 한 통계조사에 따르면 20·30대의 67%가 “영화를 보고 처음으로 반민특위와 친일파 청산 실패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고 답했다. 즉 1,270만 명이라는 거대한 흥행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미해결된 분노가 영화로 폭발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김원봉이 2019년에 와서야 공식적으로 독립유공자 서훈 논의가 시작된 것도, 영화 《암살》이 그를 다시 호명한 영향이 컸다.
8. 역사가 처벌하지 못한 것을 영화가 처벌하다
📖 미스터 션샤인 — 의병 시대의 역사
영화 《암살》의 마지막 장면, 70대 노인이 된 안옥윤이 자신을 배신한 염석진을 거리에서 사살한다. 그녀는 “16년 후 이렇게 됐어. 알려야지, 우리는 계속 싸우고 있다고“라고 말한다. 이 장면은 가공이지만, 그것이 표현하는 한국인의 정서는 진짜다. 우리는 친일파를 단죄하지 못했고, 그 죄책감과 분노는 80년이 지난 지금도 풀리지 않았다. 영화는 그 풀리지 않은 분노를 1,270만 명의 관객 앞에서 한 번이라도 풀어준 것이다. 1909년 안중근, 1932년 이봉창·윤봉길, 1933년 영화 속 안옥윤—이름이 있든 없든, 실재했든 가공이든, 그들은 모두 한 가지 일을 했다. 자기 목숨을 걸고 한 시대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잊지 않는다. 그것이 영화 《암살》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