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명량》 글 함께 읽기
2022년 7월 27일, 김한민 감독의 두 번째 이순신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이 개봉했다. 8년 전 《명량》으로 1,761만 관객 동원 신화를 쓴 감독의 후속작이었지만, 흥미롭게도 영화 속 시간은 명량(1597)보다 5년 앞선 1592년의 한산도 대첩을 다룬다. 같은 우주, 같은 인물, 그러나 다른 배우(박해일), 다른 무기(거북선), 다른 전술(학익진)—한산은 단순한 시리즈 후속편이 아니라 ‘명량의 뿌리이자 시작점’을 그린 영화였다. 한산도 대첩은 임진왜란 발발 3개월 만에 일본 수군 주력을 무너뜨린 결정적 전투로, 일본의 한반도 정복 계획 자체를 좌절시킨 전쟁사적 분기점이었다. 영화가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각색인지, 그리고 왜 학자들이 “한산이 명량보다 더 위대하다“고 말하는지 들여다본다.

1. 한산이 다룬 1592년 — 임진왜란 발발 3개월
한산도 대첩이 일어난 1592년 7월 8일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단 3개월 만의 시점이었다. 그해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 16만 대군은 단 20일 만에 한양을 함락시켰고(5월 3일), 6월에는 평양까지 진격했다. 선조는 의주로 피신했고, 조선 조정은 사실상 마비 상태였다. 그런데 그때 단 한 곳에서만 조선이 일본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좌수영의 수군이었다. 그는 이미 5월 옥포해전, 사천해전, 당포해전, 당항포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연달아 깨뜨렸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소규모 전투였다. 일본이 본격적으로 수군 주력을 동원해 결판을 내려 한 것이 바로 한산도였고, 영화 《한산》은 정확히 그 순간을 다룬다.
2. 와키자카 야스하루 — 도요토미의 신진 무장
일본 측 함대를 지휘한 인물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변요한 분)—실존 인물이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임을 받는 신진 무장으로, 이미 6월 용인 전투에서 1,500명의 병력으로 조선군 5만 대군을 격파한 자였다. 그 자신감으로 그는 한반도 남해안의 조선 수군을 일거에 쓸어버리려 했다. 그의 함대는 대선 36척 + 중선 24척 + 소선 13척, 총 73척. 약 1만 5천 명의 일본 수군이었다. 와키자카는 와키자카 사베에·와타나베 시치에몬 같은 부장들을 거느리고 견내량에 자리잡았다. 견내량(見乃梁)은 거제도와 통영 미륵도 사이의 좁고 위험한 해협으로, 그가 그곳을 거점으로 삼은 것은 좁은 지형에서 화력을 집중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그 좁은 지형이 결국 그를 가둘 함정이 되었다.
3. 견내량 유인 — 좁은 해협에서 넓은 바다로
이순신이 사용한 전술은 단순하면서도 천재적이었다. ‘견내량 유인 작전’이다. 그는 좁은 견내량에서 정면 충돌하는 대신, 일본 함대를 한산도 앞바다라는 넓은 해역으로 끌어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좁은 해협에서는 양측의 화력이 제한되지만, 넓은 바다에서는 조선 함대의 진형 운영과 화포 사거리가 일본의 백병전을 압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전은 이러했다. ① 조선 함대 일부(약 5~6척)가 견내량으로 진입해 일본 함대를 도발, ② 일본 함대가 추격해 오면 후퇴하며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 ③ 본 함대 50여 척이 미리 대기하며 ‘학익진(鶴翼陣)’으로 진형을 형성. 와키자카는 이 함정을 알아채지 못한 채 자기 함대를 끌고 견내량을 빠져나왔다. 그 순간 그는 자기가 어떤 함정에 들어갔는지 깨달았다.
4. 학익진(鶴翼陣) — 무기 격차를 진형으로 극대화
영화의 가장 시각적으로 압도적인 장면은 학익진의 펼침이다. 학(鶴)의 날개가 펼쳐지듯 56척의 판옥선이 U자 모양으로 일본 함대를 포위한다. 이는 단순한 시각적 연출이 아니라 실제 이순신이 사용한 전술이다. 학익진의 핵심 원리는 다음과 같다. ① 적이 진입할 때 좌우 날개를 점차 안으로 좁혀 적을 가두고, ② 가장 화력이 강한 중앙 본진이 적 함대의 앞을 막아서며, ③ 좌우 날개에서 동시에 측면 사격을 가해 적이 후퇴도 진격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조선의 판옥선은 일본 세키부네보다 크고 견고하며, 측면에 천자총통·지자총통 같은 대형 화포를 다수 탑재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학익진의 측면 사격에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일본 측은 화포가 거의 없고 조총만 있어 사정거리·관통력에서 압도적 열세였다. 학익진은 ‘무기 격차를 진형으로 극대화하는 전술’이었다.

5. 거북선의 진짜 활약 — 한산에서 시작해 한산에서 끝났다
영화의 또 다른 핵심 시각 요소는 거북선이다. 박해일의 이순신이 신형 거북선의 등장을 직접 지휘하며, 적진을 분쇄하는 장면이 클라이맥스로 그려진다. 실제 한산도 대첩에 거북선이 등장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정확한 숫자는 사료마다 약간 다른데, 학자들은 2~3척이 참전했다고 본다(1척만 참전했다는 설도 있음). 영화는 거북선의 외관을 일부 변형해 시각적 임팩트를 더했지만, 거북선의 핵심 기능—적진 돌격, 화포 일제사격, 화공 방어를 위한 갑판 철판·돌기—은 정확하게 묘사했다. 실제 거북선은 임진왜란 초반 사천 해전(1592.5.29)에서 처음 등장해 한산도 대첩에서 절정의 활약을 했다. 그러나 1597년 7월 칠천량 해전에서 모두 소실되어, 명량에는 거북선이 한 척도 없었다. 즉 거북선의 영광은 한산에서 시작해 한산에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 59척 격침, 9천 명 전사 vs 조선 전선 0척
한산도 대첩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일본 측 전선 73척 중 59척이 격침·나포되었다. 격침 47척, 나포 12척, 도주 14척. 일본군 전사자는 약 9,000명으로 추정된다(『난중일기』·『이충무공행록』 종합). 와키자카 야스하루 본인은 작은 배로 가까스로 도주해 목숨을 건졌지만, 그의 부장 와키자카 사베에·와타나베 시치에몬은 전사했다. 반면 조선 측의 손실은 전사자 19명, 부상자 116명, 그리고 가장 놀라운 것은 전선 손실이 0척이었다는 점이다. 56척 모두 멀쩡히 살아남았다. 이는 인류 해전사에서도 거의 유례없는 결과다. 73 대 56의 비율에서 적을 81%(59/73) 격멸하고 자기 함대 손실 0%를 기록한 전투는 전 세계 해전사를 통틀어 손꼽힌다. 영국 해군 학자 G. A. 발라드(Ballard) 제독은 1921년 그의 저서에서 “이순신은 영국 해군의 영웅 넬슨에 필적하는 천재적 해군 지휘관이었다“고 평가했다.

7. 박해일의 이순신 vs 최민식의 이순신
그렇다면 박해일의 이순신과 최민식의 이순신은 어떻게 다를까? 두 배우는 의도적으로 매우 다른 이순신을 연기했다. 박해일의 이순신(한산)은 임진왜란이 막 시작된 47세, 전라좌수사로서 자신의 첫 대규모 대결을 앞둔 젊고 신중한 전략가다. 영화 속 그는 거의 말이 없고, 표정도 절제되어 있으며, 모든 결정을 깊은 사색 끝에 내린다. 반면 최민식의 이순신(명량)은 5년이 흐른 52세, 백의종군에서 막 복귀한 절망적 상황에서 결연한 의지의 노장(老將)이다. 두 연기는 같은 인물의 다른 시기를 정확히 포착했다. 실제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1592년의 이순신은 전략적 계산과 학자적 신중함이 두드러지고, 1597년의 이순신은 죽음을 각오한 결연함과 통한이 두드러진다. 두 배우는 사료가 그리는 두 시기의 이순신을 정확히 연기해낸 셈이다.
8. 한산이 명량보다 더 위대한 세 가지 이유
흥미로운 사실은 학자들 사이에서 종종 “한산이 명량보다 더 위대한 전투였다”는 평가가 나온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셋이다. 첫째, 전쟁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꿨다. 명량은 정유재란의 한 변곡점이었지만, 한산은 임진왜란 전체의 흐름을 바꿨다. 한산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군을 통한 한반도 횡단 보급선 확보를 포기해야 했고, 이것이 결국 일본의 한반도 정복 계획 자체를 좌절시켰다. 둘째, 전술의 완벽성—명량은 ‘울돌목 + 조류’라는 지형 특성에 크게 의존했지만, 한산은 순수하게 ‘유인 + 진형 + 화력’이라는 전술의 승리였다. 셋째, 일본 측 손실 규모—명량의 31척에 비해 한산은 59척으로 거의 두 배다. 영화 《한산》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한 전투가 아니라, 한 전쟁의 향방을 결정한 가장 결정적 순간이다. 이순신 3부작을 모두 본 후에는 한 가지가 분명해진다. 한반도가 일본 식민지가 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1592년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56척의 판옥선이 학익진을 폈던 한 시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 이순신 인물 열전 — 23전 23승의 모든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