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 #35] 발해(渤海) — AD 698년 대조영이 세운 잊혀진 만주의 한국 왕국 228년

📖 고구려 건국과 주몽 · 📖 광개토대왕비

AD 668년, 한반도 역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자랑하던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그러나 그 멸망은 끝이 아니었다. 30년 후인 AD 698년, 만주의 한 산악 지대에서 고구려 유민 출신의 한 인물이 새 나라를 세웠다. 대조영(大祚榮)—후일 발해의 시조 고왕(高王)이다. 그가 세운 나라 발해(渤海)는 그 후 228년 동안 만주와 한반도 북부, 연해주에 걸쳐 약 100만 km²—한반도의 5배에 달하는 거대 영토—를 다스리며 당나라 황제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 동방의 융성한 나라)”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한국사 교과서에서 발해는 가장 적게 다뤄지는 시기다. 자국 사서가 거의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주를 마지막으로 지배한 한국 왕국, 잊혀진 우리 역사의 5분의 1—발해의 228년을 다시 들여다본다.

발해

1. 고구려 멸망 30년 후 — 영주의 고구려 유민들

발해 건국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고구려 멸망 후 30년의 혼란을 알아야 한다. AD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된 후, 당나라는 옛 고구려 영토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해 직접 통치를 시도했다. 그러나 고구려 유민들의 거센 저항이 계속되어 당은 결국 안동도호부를 만주로 후퇴시켰다. 동시에 당은 고구려 유민의 잠재적 위협을 막기 위해 약 20만 명의 고구려인을 만리장성 안쪽—요동·산서 일대로 강제 이주시켰다. 대조영의 부친 걸걸중상(乞乞仲象)도 이때 영주(營州, 현 랴오닝성 차오양)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 중 한 명이었다. 30년이 흐른 AD 696년, 같은 영주에 살던 거란족의 추장 이진충(李盡忠)이 당의 압제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 혼란을 틈타 대조영과 고구려 유민들이 동쪽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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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AD 698년 천문령 전투 — 대조영의 결정적 승리

AD 698년, 당나라는 도주한 고구려 유민을 추격하기 위해 대장 이해고(李楷固)가 이끄는 추격군을 보냈다. 결정적 전투는 천문령(天門嶺)에서 벌어졌다. 천문령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 의견이 갈리지만(현 지린성 화전 일대로 추정), 대조영은 험준한 산악 지형을 활용해 당군을 매복 공격으로 격파했다. 이 한 전투로 당의 추격이 완전히 끊겼고, 대조영은 동모산(東牟山, 현 지린성 둔화)에 도읍을 정하고 새 나라를 세웠다. 처음 국호는 ‘진(震)’ 또는 ‘진국(震國)’이었지만, 후일 당이 책봉할 때 ‘발해(渤海)’라는 이름이 공식화되었다. 흥미롭게도 ‘발해’는 본래 중국 황해 북쪽 바다의 이름이지만, 대조영이 그 바다의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다고 해서 그 지명이 국호가 된 것이다.

대조영

3. 발해군왕 책봉 — “고구려 계승”의 정체성

AD 713년, 당 현종은 대조영에게 정식으로 ‘발해군왕(渤海郡王)’이라는 칭호를 책봉했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외교 사건이다. 당은 한때 발해의 모체인 고구려를 멸망시킨 적국이었는데, 30년 만에 그 후예의 새 나라를 정식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는 당시 당이 동방의 위협(거란·돌궐·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발해와 평화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발해 역시 신생 국가로서 당의 인정이 정통성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발해는 단순한 당의 속국이 아니었다. 자체적으로 연호를 사용했고(고왕의 ‘천통’ 등), 일본에 보내는 외교 문서에는 자신을 ‘고려국왕(高麗國王)’—즉 옛 고구려의 왕—이라 칭했다.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명확히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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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5경 15부 62주 — 광역 행정의 정교한 시스템

발해의 정치 체제는 매우 정교했다. 당의 제도를 본받아 3성 6부(정당성·선조성·중대성 + 충부·인부·의부·지부·예부·신부)를 운영했지만, 부서 이름을 당과 다르게 한반도식·유교식으로 바꿔 자기 정체성을 유지했다. 또한 5경 15부 62주의 광역 행정 체제를 구축했다. ①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본 수도, 현 헤이룽장성 닝안, ② 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초기 수도, 현 지린성 화룡, ③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일본·신라 외교 거점, 현 지린성 훈춘, ④ 서경 압록부(西京鴨綠府)—당 외교, 현 북한 자강도, ⑤ 남경 남해부(南京南海府)—신라 국경, 현 함경남도 북청. 5경 모두에 왕궁과 행정 시설이 있어 왕은 계절에 따라 각 수도를 순회하며 통치했다. 또한 주자감(胄子監, 태학)을 설치해 유교 경전을 가르치고 관리를 양성했다. 즉 발해는 단순한 부족 연맹이 아니라 당·일본과 어깨를 견주는 동아시아 정식 국가였다.

5. 4국 외교와 34회의 일본 사절

발해는 매우 활발한 4국 외교를 펼쳤다. ① 당(唐)—책봉·조공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자기 연호와 독자 외교, ② 일본(倭)—발해가 약 228년 동안 34회의 사신을 일본에 보냈고, 그 사절단이 가져간 외교 문서에 자신을 “고려(고구려)의 후예”로 칭한 기록이 일본서기·속일본기에 명확히 남아 있음, ③ 신라—국경 분쟁이 있었지만 무역과 외교도 활발, ④ 돌궐·거란·말갈—초원 민족들과의 견제·동맹·교역. 특히 일본과의 관계가 흥미롭다. 발해 사절단이 일본 수도(헤이안교)에 도착하면 일본 천황이 직접 영접했고, 시·서·예에 능통한 발해 사절들은 일본 귀족들의 큰 존경을 받았다. 이는 발해가 단순한 변방 국가가 아니라 동아시아 문화권의 정식 일원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발해는 신라보다 일본과 더 가까운 외교 관계를 유지해, 동아시아 외교의 균형을 이끄는 핵심 역할을 했다.

발해 멸망

6. “해동성국” — 9세기 발해의 절정

발해의 절정기는 9세기 선왕(宣王, 재위 818~830) 시대였다. 그는 영토를 최대로 확장해 ① 북쪽으로 헤이룽강 유역, ② 남쪽으로 함경도, ③ 동쪽으로 연해주, ④ 서쪽으로 요동 일부까지 약 100만 km²—한반도의 5배—를 통치했다. 인구는 약 300만, 5경 15부 62주의 광역 행정 체제가 안정적으로 작동했다. 당시 당 황제 현종(또는 무종)이 발해에 “해동성국(海東盛國)”—”동방의 융성한 나라”—이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당이 자기보다 작은 국가에 이런 칭호를 하사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로, 발해의 위상이 당과 거의 동등한 동아시아 강국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발해의 문화는 매우 화려했다. 불교가 융성해 상경 용천부에는 거대 사찰들이 들어섰고, 발해 불상·도자기·기와는 그 정교함으로 유명했다. 발해의 비단·인삼·말·해표가죽은 당·일본·신라에 수출되어 무역 흑자를 기록했다.

7. AD 926년 — 단 28일에 무너진 강대국의 미스터리

그러나 영광은 짧았다. AD 926년 1월, 거란의 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발해를 침공했다. 그의 군대는 발해 수도 상경을 단 28일 만에 함락시켰다. 마지막 왕 대인선(大諲譔)은 항복했고, 약 228년의 발해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발해의 갑작스러운 멸망은 한국사의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다. “해동성국”이라 칭송받던 강대국이 왜 단 28일 만에 무너졌을까? 학자들의 가설은 세 가지다. ① 화산 폭발설—백두산이 약 946년경 거대 화산 폭발(VEI 7급)을 일으켰고, 그 직전 화산활동이 발해 영토를 황폐화시켰다는 학설. ② 내부 분열설—발해 지배층이 고구려계와 말갈계로 나뉘어 갈등이 심화되어 단결이 무너졌다는 학설. ③ 거란의 군사 천재성—야율아보기의 기동전과 발해의 정보 부재가 결정적이었다는 학설. 어느 쪽이든 사실은 분명하다. 만주를 지배한 마지막 한국 왕국이 사라진 것이다.

8. 만주를 지배한 마지막 한국 왕국

발해 멸망 후 그 유민들은 어디로 갔을까? 약 10만 명 이상의 발해 유민이 고려로 망명했고, 고려 태조 왕건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신하·관료로 등용했다. 고려 광종 시기에는 발해 유민 출신 학자·관료가 다수 등장하여 고려 초기 문화 형성에 기여했다. 또한 발해 부흥 운동(정안국·후발해·홀한주 등)이 약 200년에 걸쳐 계속 일어났지만 모두 단명했다. 발해 멸망 후 한반도 영토 의식에서 만주가 사라졌고, 이는 후일 한국사가 “한반도 안 역사”로 좁아지는 결정적 분기점이 되었다. 한국사 교과서가 통일신라+발해를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로 부르는 것은 발해가 한국사의 한 축임을 인정하는 결정이며, 1980년대 이후 정착된 시각이다. 그러나 여전히 발해는 우리 역사 교육의 사각지대에 있다. 자국 사서가 거의 남지 않아 중국 신구당서와 일본 사서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단 하나—만주는 한 번 우리의 것이었고, 그 시기가 228년이었다는 사실이다. 📖 신라 박혁거세 — 같은 시기 남쪽의 한국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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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FAQ)

Q1. 발해는 한국 역사인가요?

네, 한국 학계 정설입니다. ① 건국자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 출신, ② 일본 외교 문서에서 자기를 “고려국왕(고구려 후예)”으로 칭함, ③ 지배층 다수가 고구려계, ④ 발해 멸망 후 유민 10만+이 고려로 망명. 다만 중국 학계는 발해를 “중국 지방정권”으로 보는 입장이며(동북공정), 이는 한·중 역사 인식 갈등의 핵심 이슈입니다. 한국 학계는 발해를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시대”의 한 축으로 인정합니다.

Q2. “해동성국”은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한자 그대로 “동쪽 바다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입니다. 9세기 당나라 황제(현종 또는 무종)가 발해에게 하사한 정식 칭호입니다. 당이 자기보다 작은 주변 국가에 이런 영예 칭호를 주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이는 당시 발해가 당과 거의 동등한 동아시아 강국으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발해 외교 사절단의 학문·예법이 매우 뛰어났다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Q3. 발해는 왜 단 28일 만에 멸망했나요?

한국사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입니다. 학설은 세 가지: ① 백두산 화산 폭발설 — 약 946년경 백두산이 거대 화산 폭발을 일으켰는데, 그 직전 화산활동이 발해 영토를 황폐화시켰다는 학설(다만 폭발 시기에 논쟁), ② 내부 분열설 — 고구려계와 말갈계의 갈등으로 단결이 약화, ③ 거란의 군사 천재성설 — 야율아보기의 기동전과 발해 정보망 부재. 어느 쪽이 결정적이었는지는 자료 부족으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Q4. 발해 유적은 어디에서 볼 수 있나요?

대부분 중국과 북한·러시아 연해주에 있습니다. ① 본 수도 상경 용천부 —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시 발해진, 거대 도시 유적 + 흥륭사 석등 등 보존, ② 중경 현덕부 — 지린성 화룡시 서고성, ③ 동경 용원부 — 지린성 훈춘시 팔련성, ④ 일부 발해 유물 —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연해주 박물관(러시아). 한국에서 직접 가기는 어렵지만 중국·러시아 관광 코스로 답사 가능합니다.

Q5. 발해 자국 사서가 왜 거의 안 남았나요?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후, 옛 발해 영토에 동란국(東丹國)을 세우고 발해 도시·문서를 대거 소각·파괴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거란 → 여진 → 몽골 → 만주족이 차례로 그 지역을 지배하면서 발해 자체 기록은 거의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현재 발해 역사는 ① 중국 신·구당서 발해전, ② 일본 속일본기·일본후기 외교 기록, ③ 고고학 발굴 유물, ④ 18세기 조선 학자 유득공의 『발해고(渤海考)』 등을 종합해 재구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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