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뉘른베르크(Nürnberg)는 독일에서 가장 모순적인 도시다. 중세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이 즉위 후 첫 의회를 여는 “제국의 비공식 수도”였고, 알브레히트 뒤러를 비롯한 르네상스 거장들이 활동한 예술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20세기, 같은 도시가 나치 전당대회의 무대가 되었고, 1935년 “뉘른베르크 인종법”이 공포되었으며, 1945~46년 나치 지도부 24명이 인류 최초의 국제전범재판을 받은 곳도 이곳이었다.
한 도시에 이렇게 영광과 치욕, 부활과 심판이 겹쳐 새겨진 곳은 유럽에 흔치 않다. 오늘 뉘른베르크의 거리를 걸으면, 카이저부르크 성에서 도쿠멘테이션 센터까지 800년의 역사가 4km² 구시가지 안에 빼곡히 압축되어 있다.
1. 신성로마제국의 비공식 수도 — 1219년 자유제국도시
1219년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뉘른베르크에 “자유제국도시(Freie Reichsstadt)” 칙령을 내렸다. 이는 어떤 영주의 지배도 받지 않고 황제에게 직접 충성하는 도시를 뜻한다. 뉘른베르크는 곧 신성로마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자유시 중 하나가 되었다.
결정적 순간은 1356년 황제 카를 4세의 금인칙서(Goldene Bulle)다. 황제 선출 절차를 규정한 이 법령은 “새 황제는 즉위 후 첫 제국의회(Reichstag)를 뉘른베르크에서 열어야 한다”고 못박았다. 이후 200년간 거의 모든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뉘른베르크에서 처음 의회를 열었다. 도시는 “비공식 제국 수도”였고, 황제의 보물(왕관·홀·검)도 이곳에 보관되었다.
2. 알브레히트 뒤러와 르네상스 — 1471년의 도시
1471년, 한 헝가리 출신 금세공업자의 아들이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다. 그는 독일 르네상스의 가장 위대한 화가가 되었고, 「자화상(1500)」·「멜렌콜리아 I(1514)」 같은 작품으로 북유럽 미술의 새 장을 열었다.
뒤러가 살았던 카이저부르크 성 아래의 4층 목조 가옥은 오늘날 박물관(Albrecht-Dürer-Haus, 입장료 €7.5)으로 보존되어 있다. 그의 동시대인이 한국에서는 신숙주·강희맹·정선의 시대(15~16세기)에 해당하며, 뒤러의 정밀 판화 기법은 동시대 동아시아 회화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3. 1933~1938 — 나치 전당대회와 천 년 제국의 환상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잡자, 나치당은 곧바로 매년 뉘른베르크에서 “제국 전당대회(Reichsparteitag)”를 열기 시작했다. 1934년 행사는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이 「의지의 승리」로 기록했고, 1938년까지 매년 9월 약 50만 명의 나치 당원이 모여들었다.
왜 뉘른베르크였나? 히틀러는 “신성로마제국 = 제1제국, 비스마르크 독일 = 제2제국, 나치 독일 = 제3제국”이라는 도식을 만들고, 중세 황제들의 수도였던 뉘른베르크를 자기 정통성의 무대로 삼았다. 도시 남동쪽에 11km²에 달하는 전당대회장(Reichsparteitagsgelände)이 건설되었고, 일부는 완공되지 못한 채 폐허로 남아 있다.
1935년 9월 15일, 같은 도시에서 악명 높은 “뉘른베르크 법(Nürnberger Gesetze)”이 공포되었다. 유대인의 시민권 박탈과 “독일인과 결혼 금지”를 규정한 인종법이다. 영광의 도시가 가장 치욕적인 법의 무대가 되는 데 600년이 걸린 셈이다.
4. 1945~46 뉘른베르크 재판 — 인류 최초의 국제전범재판
1945년 8월, 연합국(미·영·프·소)은 런던 협정에서 합의했다. “이번에는 베르사유처럼 패전국에 굴욕적 배상만 강요하지 않는다. 전쟁 책임자 개인을 법정에 세운다.” 재판 장소로 뉘른베르크가 선택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1) 나치 전당대회의 상징 도시였다는 정치적 상징성, (2) 도시 법원 600호 법정(Schwurgerichtssaal 600)이 폭격을 피해 보존되어 있었다.
1945년 11월 20일 개정. 24명의 피고가 4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1) 공모, (2) 평화에 반하는 죄, (3) 전쟁범죄, (4) 반인도적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 마지막 죄목이 인류 법사상 처음 등장한 순간이다. 1946년 10월 1일 판결: 12명 사형, 3명 종신형, 4명 유기징역, 3명 무죄, 1명 자살, 1명 질병으로 재판 불가.
수석검사 로버트 잭슨(Robert H. Jackson, 미국 대법관)의 개정 연설은 법사상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 중 하나로 남았다. 한국 역시 이 재판의 영향을 받았다. 6.25 전쟁 후 한국이 만든 국제법 교과서들은 거의 모두 뉘른베르크 원칙(1950년 UN 채택)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5. 카이저부르크 성 — 950년의 황제 거처
구시가지 북쪽 언덕에 솟은 카이저부르크(Kaiserburg)는 1050년 황제 하인리히 3세가 처음 세웠고, 이후 950년 동안 모든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한 번쯤 머문 곳이다. “더블 채플(Doppelkapelle)” — 위층은 황제, 아래층은 신하용 — 의 구조가 인상적이다.
2차 대전 폭격으로 90%가 파괴되었으나, 1950년대 시민들의 손으로 옛 돌 하나하나를 맞춰 복원되었다. 입장료 €7. 성벽 위에서는 뉘른베르크 구시가지 전체와, 멀리 전당대회장 폐허까지 한눈에 보인다.
6. 크리스트킨들마르크트 —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크리스마스 마켓
1628년 처음 기록된 뉘른베르크의 크리스트킨들마르크트(Christkindlesmarkt)는 오늘날 세계 최대·최고(最古) 크리스마스 마켓이다. 매년 12월 첫째 금요일 ~ 12월 24일, 구시가지 한가운데 광장에 200여 개 부스가 들어선다. 매년 200만 명이 찾는다.
이곳의 명물은 렙쿠헨(Lebkuchen, 진저브레드)과 뉘른베르거 브라트부르스트(Nürnberger Bratwurst) — 손가락만 한 미니 소시지로, 15세기부터 도시 조례로 크기가 7~9cm로 정해져 있다(EU 원산지 보호 식품).
7. 뉘른베르크 한국인 여행자 코스 — 1박 2일

베를린에서 ICE 열차로 3시간 20분(약 €60), 뮌헨에서는 1시간(약 €30). 인천에서 직항이 없으니 프랑크푸르트나 뮌헨을 거치는 게 가장 빠르다.
1박 2일 코스 추천: 1일차 오전 카이저부르크 성 → 점심은 한트베르커호프(중세 장인 마을)에서 미니 소시지 → 오후 알브레히트 뒤러 생가 → 저녁 구시가지 산책. 2일차 오전 600호 법정(Memorium Nürnberger Prozesse) → 점심 후 도쿠멘테이션 센터(나치 전당대회장 박물관) → 야간 ICE로 다음 도시 이동.
8. 두 얼굴을 모두 보여주는 도시의 용기
많은 도시가 어두운 과거를 숨긴다. 그러나 뉘른베르크는 정반대를 택했다. 미완으로 끝난 거대한 나치 전당대회장을 헐어버리지 않았고, 그 안에 도쿠멘테이션 센터(2001)를 지어 “어떻게 한 도시가 그 광기에 끌려갔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600호 법정도 매주 토·일 일반에 공개된다.
한국으로 치면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청사를 헐기보다 박물관으로 만들어 “왜 우리가 이 폭력에 짓밟혔는가”를 가르치는 길을 택한 것과 비슷하다. 뉘른베르크는 자신의 가장 영광스러운 시대(중세)와 가장 부끄러운 시대(나치)를 모두 같은 거리 안에 보존함으로써, “역사는 직시할 때만 교훈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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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AQ
Q1. 뉘른베르크는 며칠 일정이 좋나요?
A. 1박 2일이 적당합니다. 1일차 중세(카이저부르크·뒤러 생가), 2일차 20세기(재판소·전당대회장) 두 테마로 나누면 효율적입니다.
Q2. 600호 법정에 들어갈 수 있나요?
A. 네. 평일에는 실제 재판이 열리지 않는 토·일에 한해 일반 관람이 가능합니다. 입장료 €7.5(메모리움 뉘른베르거 프로체세 포함).
Q3. 크리스마스 마켓은 언제 가는 게 좋나요?
A. 12월 첫째 금요일 ~ 24일 운영, 평일 오전이 가장 한산합니다. 주말 저녁은 인파가 매우 많습니다.
Q4. 영화 추천은?
A. 「뉘른베르크의 재판(Judgment at Nuremberg, 1961)」 —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 스펜서 트레이시 주연. 실제 재판을 모티프로 한 명작. 다큐로는 「뉘른베르크: 그 잊혀진 필름(2004)」.
Q5. 뉘른베르크 미니 소시지를 어디서 먹나요?
A. 구시가지 한트베르커호프 안의 “브라트부르스트호이슬레(Bratwursthäusle)” — 1419년 개업, 600년 전통의 식당. 6개에 €9 정도.


























